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43/문화일보)

해군52 2013. 2. 6. 18:36

로맨틱한 사랑의 애환 다룬 ‘명동노래’… 촉촉하고 현란한 창법으로 심금 울려

(43) 박인환-현인의 ‘세월이 가면’

 

1954년 어느 봄날.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과 시인 박인환, 그리고 언론인 이진섭은 명동 입구에 있던 동방 문화회관에서 만났다. 현인과 이진섭은 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 전신) 2년 선후배 사이. 이진섭과 박인환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 이진섭은 해방 후 정동 방송 시절 아나운서를 지내기도 했다.

 

당시 명동은 6·25 전쟁으로 폐허였지만 명동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환도와 함께 하나둘 모여들었다. 문인, 화가, 연극인, 가요인, 음악가, 언론인들이 동방 문화회관을 찾았던 것이다.

 

1954년부터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명동. ‘동방회관’과 대폿집 ‘은성’은 문화인들의 집결처요 근거지였다. 누굴 만나거나 연락할 일이 있으면 그리로 가는 것이었다.

 

은성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다시피 탤런트 최불암의 자당이 운영하던 곳으로 술집 분위기가 아주 훈훈했다. 소설가 김광주·이봉구, 작사가이기도 한 유호, 시인 조병화·박인환, 그리고 이진섭과 현인이 낮이나 밤이나 찾아와서 술을 마셨다.

 

“노래의 패턴을 좀 바꿔보자! ‘신라의 달밤’이나 ‘서울 야곡’과 같은 노래가 애창곡으로 불리는 걸 보면 우리도 이젠 센강을 노래한 샹송처럼 뭔가 변화를 좀 보여주자!”

 

셋은 은성에서 만나게 되면 문학과 노래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통금시간이 임박해서는 모두들 곤드레만드레가 됐다. 죽이 잘 맞았던 것이다.

 

“먼저 좋은 노래시가 나와야 한다. 박 시인(박인환)이 우선 시를 탄생시켜라! 작곡이 전문은 아니지만 가수 현인을 위해 나도 작곡을 해보겠다.”

 

샹송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던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이에 코끼리 ‘현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보라고! 이 서늘한 눈매를 보라고! 코끼리는 어느 때 코를 높이 쳐드는지 아나? 갈증이 날 때지! 그리고 필요한 것을 구할 때지.”

 

박인환이 노래를 의식하고 쓴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를 갖고 나오자 셋은 곧바로 작곡으로 들어갔다. 이진섭은 도시 소시민적인 사랑의 애환을 다룬, 다소 감상적인 이 서정시를 ‘명동 노래’로 만들겠다며 보름간이나 끙끙댔다. 노래시가 던지는 전후의 상흔을 살리려고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마침내 음반에 현인 노래가 취입됐다. 이 노래는 명동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애창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현인은 작곡에도 뛰어났다. 중국 베이징(北京) 비밀 감옥소에 6개월간 갇혀 있을 때 작곡한 명동의 노래 ‘서울 야곡’이 유호의 작사로 그 멜로디가 살아나고 널리 불리자 시공관(명동 국립극장) 무대에서 ‘서울 야곡’과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처음으로 불렀다.

 

명동의 모더니스트들은 모두가 환호했다. 현인은 그 촉촉하고 현란한 창법으로 마침내 ‘세월이 가면’을 메마른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1923년 강원 인제에서 태어난 시인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다니다가 해방 후에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한때는 경향신문 사회부 차장을 지냈다.

 

1956년 33세로 요절한 그는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비롯,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시가 비평성과 서정성의 조화를 얻어 원숙할 즈음에 타계한 것이었다.

 

여류작가 박기원 씨의 부군이기도 한 이진섭은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팔방미인이었다.

 

명동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던 동방 문화회관이나 은성도 이제는 사라졌다.

 

현인에 이어 박인희가 부르기도 한 이 노래 ‘세월이 가면’은 명동을 사랑하는 가요팬뿐만 아니라 노래시로 명가요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동 노래 유호 작사, 현동주 작곡 ‘서울 야곡’ 또한 이 무렵 명가요로 손꼽혔다. 서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 노래는 당시 명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봄비에 흠뻑 젖어 불렀기 때문.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이 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