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도자와 술 (13)
여제 살린 ‘리가 블랙’ 황제도 감탄한 ‘우니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가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방문했을 때 심각한 병에 걸렸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였다.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효험이 없자, 주변의 권유로 리가 특산 약주를 마셨고 병은 씻은 듯 나았다. 여제를 살린 술, ‘리가 블랙 발삼’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사경을 헤매다 황실 주치의로부터 약술 한 잔을 건네받았다. 40여 종의 약초와 향신료를 재료로 만든 이 술 ‘우니쿰’은 헝가리의 국민주가 됐다. 리가 블랙 발삼과 우니쿰은 전통적 개념의 건강 목적 술인 ‘비터스’ 제품에 속한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을 무대로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화 사조로서, 합리적 이성에 기초를 두고 낡은 사상을 타파하려는 일종의 혁신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계몽주의를 주도한 학자 중에는 철학자인 스피노자와 로크, 역사학자 볼테르, 수학자 뉴턴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은 유럽 내 군주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계몽주의를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국정 철학으로 인식하면서 이를 정국 운영 기조로 채택하려고 노력했다.
계몽주의 전제군주로 일컬어지는 지도자 중에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그리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른바 ‘계몽주의 군주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중 예카테리나 2세와 요제프 2세는 남다른 정치 행보와 사생활 이외에도 생전에 유명한 유럽의 약주(藥酒)와 남다른 인연이 있어 애주 호사가들의 흥미를 더한다.
먼저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1729~1796, 재임기간 1762~1796)는 러시아 역사에서 여자 황제로는 가장 오래 통치한 인물이다.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대제(大帝)로 불리는 황제는 표트르 1세와 함께 예카테리나 2세 단둘이라는 점은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카테리나 2세의 어릴 적 이름은 소피 프리데리케(Sophie Friederike)였다. 통일 독일의 근간을 이룬 지역인 프로이센과 스웨덴 접경 지역에 있는 안할트 제르프스트라는 소공국의 공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두 사촌형제가 스웨덴 왕이 될 정도로 명문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
우니쿰(왼쪽), 리가 블랙.
그는 어릴 때부터 프로이센과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복잡미묘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항상 정략결혼 대상으로 거론돼왔다. 그를 이용해 권력을 얻고 싶어한 야심 찬 어머니 요한나(Joanna Elisabeth·1712~
1760)의 후원 아래 그는 당시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의 손에 거두어졌다. 유명한 표트르 대제의 친딸로 오늘날 러시아 국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군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엘리자베타 여제(Elizaveta Petrovna·1709~1762, 재위기간 1741~1762)는 요한나는 배척했지만 그녀의 딸인 소피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해 러시아 정착에 필요한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나갔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소피의 아버지는 그녀가 러시아에서 기반을 잡기 위해 어쩔 수없이 거쳐야 하는 개종(루터교→러시아정교)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1744년 그리스정교 신자가 되면서 엘리자베타 여제의 모친인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I·1684~1727, 재위기간 1725~1727)를 기리는 뜻에서 ‘예카테리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745년 훗날 러시아황제 표트르 3세가 되는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인 카를 울리히와 결혼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16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적 이유로 이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겨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카를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던 엘리자베타 여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로 정해놓은 그의 조카였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탓인지 엘리자베타 여제는 황실의 안정을 강력히 원했고, 이 때문에 프로이센에서 자란 어린 조카 카를을 불러와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작 예카테리나와 카를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원래 결혼 전부터 인간적으로 카를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혼 후 무능하고 알코올 중독인데다 괴팍한 성격의 그에게 더욱 실망했다. 그가 다른 남자들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공식적으로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훗날 예카테리나 2세의 뒤를 이어 러시아 황제 파벨 1세(Pavel I·1754~1801, 재위기간 1796~1801)로 즉위한 아들도 아버지가 카를이 아니라 젊은 장교였던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 Saltykov·1726~1765)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로 치부될 정도였다.
남편을 제거한 예카테리나의 쿠데타
어쨌든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예카테리나의 남편 카를은 표트르 3세(Peter III, 1728~1762, 재위기간 1762년 1월~1762년 7월)로 즉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제7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어머니 엘리자베타 여제와는 달리 그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이며 유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프로이센의 황제이자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으로 한 계몽 전제군주로 평가되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1712~1786, 재위기간 1740~1786)를 숭배하다시피 해 러시아군 제복을 프로이센군과 비슷하게 바꾸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국민으로부터 인기가 결정적으로 하락한데다 급기야 일련의 대내외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주위의 큰 불만을 사게 된다.
표트르 3세와는 달리 예카테리나는 같은 프로이센 출신이지만, 러시아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타고난 총명함으로 러시아 귀족과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야심가였다. 결국 표트르 3세는 즉위한 지 불과 반년 만인 그해 7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받은 부인 예카테리나의 쿠데타로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후인 1762년 7월 17일 유폐돼 있던 로프샤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 암살의 배후에 과연 예카테리나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느냐 여부는 지금까지 역사가들의 단골 관심거리이지만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 성공적인 쿠데타 결과 예카테리나는 마침내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가 됐고, 그의 치세는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외교 정책을 통해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투르크 제국과 폴란드(Poland-Lithuanian Commonwealth)로부터 상당한 땅을 확보해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장함으로써 대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예카테리나는 당시만 해도 유럽의 후진국이던 러시아에 발전한 서구 문화와 교육 제도를 도입해 러시아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는 예술과 문학 활동에 있어 든든한 후원자 역할도 해 오늘날 관광명소로도 유명한 겨울궁전 내의 에르미타주 박물관도 생전에 그녀가 수집한 소장품들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그의 정치철학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상당 부분 탁상공론에 그치며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귀족들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하는 농노제의 확대는 러시아 백성의 큰 불만을 야기해 급기야 1773년 러시아 전역을 휩쓴 ‘푸카초프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스스로 표트르 3세로 칭한 전직 군인 푸카초프(Yumelyan Pugachov·1742~1775)가 주도한 이 농민 봉기는 1775년까지 계속되다 정부군에 의해 철저히 진압당하고 푸카초프도 모스크바에서 처형된다.
그런데 예카테리나 2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런 정치·외교적인 행적 이외에 그녀가 사생활에서 보여준 화려한(?) 남성 편력도 꼭 따라 나온다. 앞서 말한 첫 외간 남자인 세르게이 살티코프를 필두로 황위에 오른 뒤에도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21명의 남자를 두었고 마지막 연인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생겼다고 전한다. 연인들 중에서는 그의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하게 만들어준 오를로프(Grigory Orlov·1734~1783),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예카테리나의 힘을 빌려 폴란드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한 포이나토프스키(Stanislaw Poniatowski· 1732~1798), 그리고 가장 가까웠던 연인으로 손꼽히는 포템킨(Grigori Potemkin·1739~1791)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예카테리나 2세는 연인들에게 사랑의 대가로 지위를 올려주거나 파격적인 금전적 보상을 서슴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런 예카테리나 2세는 1796년 12월 16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드레스룸으로 이동하다 그만 쓰러지며 의식을 잃고 만다. 67세의 나이로 숨진 그의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그의 장례는 유언대로 흰 옷에 황금 왕관을 쓴 채로 성대하게 거행된다. 그리고 그의 황위는 살티코프의 아들로 여겨지는 아들 파벨이 잇는다.
女帝를 살린 술 ‘리가 블랙 발삼’
그런데 이렇게 파란만장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일생에서 술에 관한 매우 흥미 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전해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바로 예카테리나 여제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리가는 구소련에서 독립해 현재 발틱 3국으로도 불리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중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인 1710년 전쟁으로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 영토가 됐다. 표트르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에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그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만다. 지금 추정해보면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주위의 권유로 리가 특산 약주를 마셔보기로 했다. 그 약주의 효과는 대단했다. 마신 지 얼마 후 그의 병은 씻은 듯 나았다. 이 일로 그 약주는 여제를 살린 술로 유명세를 탔고, 역대 러시아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드골 프랑스 전 대통령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음용했다.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 애칭으로 ‘블랙 리가(Black Riga)’라고도 불린다. 18세기 중반 리가의 한 약사(Abraham Kunze)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 이 술은 순수 보드카에 25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도수 45%의 독한 술로 자세한 성분은 비밀이다. 이 술은 예카테리나 2세의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전통적으로 감기치료 효과와 건위 작용(위를 튼튼하게 함)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술 이름에 블랙이란 말이 들어간 것은 짙은 술 색깔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명실 공히 라트비아 국민주로 자리 잡은 리가 블랙 발삼은 비단 라트비아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여러 주류품평회에서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아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이 됐다.
그러면 여기에서 리가 블랙 발삼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종류가 다른 유명한 약주와 인연이 있는 또 다른 계몽군주를 만나보자.
요제프 2세(Joseph II·1741~ 1790, 재임기간 1764~1790)는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당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함께 유럽 왕실을 양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부친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Franz I Stephan·1708~1765 재위기간 1745~1765)였고 모친이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가의 전설적 여성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1717~1780)였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1755~1793)가 바로 그의 누이동생이다.
개혁적 계몽주의 이상 펼친 요제프 2세
요제프 2세는 어릴 때부터 정열적인 야망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전제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로 전해온다. 그는 1760년 19세 때 첫 결혼을 하지만 결혼 3년 만에 부인이 죽고,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이 때문에 재혼을 망설였으나 당시 정략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바바리아 왕가 출신의 여자와 1765년 결혼한다. 그러나 이 부인마저 결혼 2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크게 상심한 그는 그 후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제프 2세는 그가 14세가 되던 해인 1765년에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황제로서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즉위 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아버지 카를 6세(Karl VI·1685~1740, 재위기간 1711~1740)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합법적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남자만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법에 의해 합스부르크가의 권리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남편이 황제가 되면서 그는 황후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거의 모두 상속받은 상태에서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해 그 후 신성로마제국 정국을 실질적으로 주도한다.
이 때문에 요제프 2세는 어머니 생전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780년 11월 29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그는 평소 정치철학인 계몽 전제군주로서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본격적인 개혁에 나섰다.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생전에 당시 유럽을 휩쓸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전의 전통적 관념이 강한 통치자였다.
요제프 2세는 철저한 중앙집권체제를 바탕으로 농노제 폐지, 교육 기회 확대, 독일어 공용화 등 개혁 정책을 시행해나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마교황의 국내 정책 간섭 배제, 수도원의 해산, 성직자 수 제한 등은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이었다. 당시 그의 개혁적 계몽주의 사상을 ‘요제프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788년부터 요제프 2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1789년에 들어서는 매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프랑스 혁명으로 그의 누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참하게 실각했고, 한편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전 영토에 걸쳐 반란이 일어나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 계속됐다. 게다가 그의 개혁에 지친 주위 사람들도 등을 돌리자, 그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갖게 된다.
결국 1790년 1월 30일 당시 합스부르크가에 소속돼 있던 헝가리에서 모든 개혁 정책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그 다음 달인 2월 20일 사망하고 만다. 그는 죽기 전 유언에서 다음과 같은 비명(碑銘)을 부탁했다.
“하려고 했던 모든 일에서 실패했던 요제프 2세가 여기 묻히다(Here lies Joseph II, who failed in all he undertook).”
후사가 없었던 그의 뒤는 동생 레오폴드 2세(Leopold II·1747~1792, 재위기간 1790~1792)가 잇는다.
“이 술은 정말 독특하다”
그런데 요제프 2세의 건강이 결정적으로 악화된 1790년 초의 일이다. 당시 황실 주치의인 헝가리 출신 의사 즈박(Dr Jo?zsef Zwack)은 사경을 헤매는 황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제조한 약술 하나를 요제프 2세에게 소개했다. 요제프 2세는 이 술을 맛보고는 “이 술은 정말 독특하다(Das ist ein Unkum, This is unique)”라고 감탄했다. 물론 당시 황제의 병은 약술 몇 잔으로 해결될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독특한 맛의 약술을 마시고 상당한 심리적 위안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40여 종의 약초와 향신료를 재료로 해 만들어진 이 술은 그 후 황제와의 인연을 기려 술 이름 자체를 ‘우니쿰(Unicum)’으로 정하고 술병에도 마치 약방을 연상시키듯 붉은 바탕에 옅은 색의 십자마크를 그려 넣었다.
그 후 우니쿰은 즈박 가문의 자손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면서 헝가리의 대표적인 국민주가 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고 공산 치하에서는 회사가 국유화되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이 기간 즈박의 자손들은 비방으로 전해오는 제조법을 들고 미국으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제품 생산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88년 공산체제 전복 1년 전에 헝가리로 되돌아온 즈박 가문은 현재 6대째 선조의 가업을 잇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유럽의 대표적인 약주 두 종류를 보면 새삼 ‘약주(藥酒)’라는 말이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전통적으로 술을 담글 때 용수로 거른 비교적 맑은 술을 귀하게 여겨 먼저 따로 보관하고 나머지 술로 막걸리를 만들어 마셨다. 이 때문에 맑은 술을 가리켜 몸에 보신이 되는 술, 즉 약이 되는 술이라고 해 약주로 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술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약초들을 혼합해 마셨기 때문에 약술의 의미를 더한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받을 때도 약술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약간은 흥미 위주로 성행하고 있는 건강점수표는 대개 15~25개의 문항을 주고 응답에 따라 점수를 부여해 건강 상태를 평가한다. 예를 들면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은 3점, 가끔 하는 사람은 1점, 그리고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0점을 준다. 이러한 건강점수 항목에는 응답자의 집안 병력이라든지 비만 여부 등을 묻는 상식적인 내용들이 당연히 포함돼 있다. 그리고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다’라는 응답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어김없이 가장 좋은 점수로 채점된다.
그런데 술에 관해서는 묘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술은 전혀 마시지 않는 쪽이 가장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마시는 사람에게 오히려 높은 점수를 주는 건강점수표가 많다. 흔히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건강 수칙의 중요한 원칙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사실 술과 담배는 건강 측면에서 볼 때 차이가 있다. 백해무익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건강에 해로운 담배에 비해 적당한 술은 혈액순환 개선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약주의 개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도의 문제일 것이다. 적당한 술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 즉 약주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그 정도가 지나치면 건강에 해가 된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활용하는지는 사람에 달려 있고, 이런 면에서 술은 마치 양날의 칼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술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이 선물해준 신비의 액체로 인식돼왔다. 오늘날 잘 알려진 술 ‘위스키’도 그 어원을 따져보면 ‘생명의 물’이라는 뜻에서 출발했다.
그런 탓인지 오랜 역사를 통해 새로운 술의 개발 및 보급 과정에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예는 수없이 많다. 앞서 소개한 헝가리 명주 우니쿰의 경우다. 그러나 의학의 발전으로 효과적인 의약품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약술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약술 ‘비터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이런 전통적 개념의 건강 목적 술들이 남아 있다. 바로 ‘비터스(Bitters)’라고 하는 술 종류의 일부 제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리가 블랙 발삼이나 우니쿰도 바로 이 계통의 술이다. 이들 술은 주로 위장 기능을 도와주는 건위 효과와 심한 감기 증상 완화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영어 이름 그대로 강한 쓴맛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른바 ‘양약은 입에 쓰다’라는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는 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비터스는 술의 분류상 발효주, 증류주에 이어 리큐어(liqueur)라는 제3의 분류에 속하는 술이기 때문에 비터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리큐어라는 술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리큐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술에 과일, 초목, 향신료 등을 혼합해 특유의 향을 낸 뒤 당분을 가미한 술이다. 이때 사용하는 술은 증류주가 원칙이며 가미하는 당분의 양은 적어도 전체 술의 2.5%를 넘어야 한다. 리큐어의 정의는 이처럼 간단해 보이지만 혼합 성분이 워낙 다양한데다 혼합 방법에도 차이가 많아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리큐어가 존재한다. 그러나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가향 보드카(flavored vodka)나 가향 진(flavored gin)은 향료를 가미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예로 든 가향 보드카나 가향 진의 경우 당분이 가미되지 않아 리큐어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리큐어의 알코올 도수는 15~30% 정도로 그렇게 높지 않지만 일부 제품에서는 50%가 넘는 것까지 있다. 리큐어는 술에 약초 성분을 섞는다는 개념으로 일찍이 건강증진 내지는 치료약으로 관심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유럽의 경우 중세 시대에 이미 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리큐어가 개발됐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중국의 경우 동물 성분까지를 포함해 많은 리큐어가 만들어졌으며, 오늘날까지 보건주(保健酒)라는 개념으로 널리 음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각종 자연 재료들을 바탕으로 설탕을 넣고 만드는 담금 술의 개념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리큐어는 어떻게 만들까. 리큐어 제조법으로는 침출법(maceration), 여과법(percolation), 증류법(distillation) 세 가지가 있다.
침출법은 차를 우려내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해하면 된다. 찻잎을 물에 넣어 그 성분을 천천히 우려내듯이, 향료 성분을 술에 넣고 천천히 그 향을 우려낸다. 주로 복숭아, 살구, 체리 같은 과일을 씨째로 증류주 안에 넣고 우려낸다.
반면 여과법은 커피를 내리는 과정과 비슷하다. 커피카루에 물을 통과시켜 커피를 내리는 것처럼 약초에 지속적으로 술을 통과시킴으로써 그 성분과 향이 스며들게 한다.
증류법은 글자 그대로 술과 향료 성분을 같이 넣고 증류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향료 성분이 술의 알코올 성분과 함께 기화되면서 완전히 섞이게 된다.
리큐어는 워낙 종류가 많아 향을 내는 재료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이 분류법에 따르면, ①허브나 향신료로 만든 리큐어(Herb and Spice Liqueurs) ②씨앗이나 초목으로 만든 리큐어(Seed and Plant Liqueurs) ③과일로 만든 리큐어(Fruit Liqueurs)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런 리큐어의 기본 개념을 놓고 볼 때 앞서 말한 비터스는 첫 번째 허브나 향신료로 만든 리큐어 범주에 넣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일반 리큐어와는 달리 비터스에서 나는 특유의 강한 쓴맛은 이 술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앙고스투라(나무)껍질, 카스카릴라(서인도제도 원산의 관목), 카시아(계피의 일종), 쓴 오렌지껍질 등이 있다.
비터스는 식전에 식욕촉진제로 사용되기도 하나 대부분은 식후에 조금 마시는 건위강장제로 이용된다. 그 특유의 강한 맛 때문에 각종 칵테일 향미제로 쓰이기도 한다. 일부 제품은 감기 몸살의 증상을 완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심한 감기 몸살을 앓을 때 소주에 고춧가루를 넣어 마시는 것을 보면, 인간의 정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것 같다.
문득 과거 소주가 다소 거친 맛을 자랑할 때(?), 주당들이 흔히 “오늘 쓴 소주나 한잔 할까”하며 퇴근길 동료들을 유혹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는 약한 도수의 부드러운 소주가 경쟁하듯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제 쓰고 강한 술은 시대에 뒤처진 술로 인식된다.
무릇 옛말에 “쓴 약은 먹기 힘드나 몸에 좋고, 쓴 말은 귀에는 거슬리나 바른 길을 가르쳐준다”라고 했다. 그러나 계몽 군주들을 살리고 감탄시킨 역사적 배경의 비터스이지만 오늘날 쓴 술은 세상의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2. 4월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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