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도자와 술 (15)
데킬라의 아버지, 아스텍 왕국의 술 ‘풀케’
아스텍을 점령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들 눈에 들어온 재밌는 술이 ‘풀케(pulke)’라는 토속주였다. 멕시코 일대에 자생하는 아가베(agave·용설란)에서는 아구아미엘(aguamiel·꿀물)이라는 천연 당을 포함한 즙이 분비되는데, 이 즙에 천연 효모가 작용하면서 저절로 발효가 일어나 만들어진 술이 풀케였다. 아스텍 정복자들은 이 신기한 술을 스페인 본국까지 보내려 했지만 낮은 알코올도수 때문에 운반할 수 없었고, 결국 풀케를 높은 도수의 증류주로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이 메즈켈과 데킬라.
스페인어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는 정복자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15~17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한 스페인들을 이르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 이 기간 많은 콘키스타도르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도 1521년 멕시코의 아스텍 왕국을 제압한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1485~1547)와 1532년 페루의 잉카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1475?~1541)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이 중 제1세대 콘키스타도르를 상징하는 인물인 에르난 코르테스는 1485년 스페인 서부 지역 작은 마을 메데인(Medell?in)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훗날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그의 외가 친척이다. 코르테스에 대한 기록은, 그의 일생에 대한 객관적인 사료가 부족한데다 업적에 대한 후세 평가도 위대한 정복자에서 사악한 약탈자에 이르기까지 극명하게 나뉘어 있어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콘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
코르테스는 14세가 되던 해에 명문 살라망카대에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에 싫증을 내고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공증인 일을 배워 이 방면 일을 하던 그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당시 모험가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이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한동네 유부녀와의 간통 현장에서 급히 도망가면서 입은 부상 때문에 계획을 일시 연기했다.
마침내 그는 19세 때인 1504년, 아메리카로 건너가 에스파뇰라(지금의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서인도제도에 속함)에 도착했다. 코르테스가 에스파뇰라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그의 먼 친척뻘이 되는 니콜라스 데 오반도(Nicol?as de Ovando·1460~1518)가 지역 총독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르테스는 에스파뇰라에 도착한 지 얼마 후부터 총독의 후원 아래 주변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큰 활약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포상으로 토지와 노예 등을 하사받는 등 개인적 기반을 쌓아갔다. 1503년 당시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제정돼 ‘엔코미엔다(encomienda)’로 불린 이 포상 제도는 정복자들에게 토지와 원주민 인디오들을 함께 나눠주면서 업적을 보상해주는 제도였다. 1511년 코르테스는 총독 보좌역인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465~1524) 휘하로 쿠바 정복 작전에 참여한다. 코르테스는 이 전투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고, 상관인 벨라스케스는 쿠바 정복에 대한 공로로 쿠바 총독으로 임명된다.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총독비서 등 총독부의 요직을 맡겼다. 앞서 말한 엔코미엔다의 혜택도 당연히 뒤따랐다.
그러나 당시 아메리카 정복자들 사이에선 음모와 배신이 난무했다. 벨라스케스 총독 역시 젊은 코르테스의 승승장구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518년 벨라스케스의 지시로 멕시코 유카탄반도 일대를 개척해나가던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va)에게 지원군을 보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벨라스케스는 처음에는 코르테스를 책임자로 해 지원군을 편성하도록 했고, 호시탐탐 더 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코르테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다. 그러나 코르테스의 충성도를 신뢰하지 않던 벨라스케스는 지원군 출발 직전에 마음을 바꾸어 책임자를 교체하려고 했다.
부유한 아스텍 왕국
평소 벨라스케스 총독의 태도로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1519년 11척의 배에 병사 500명과 말 13필을 나누어 싣고 출항해 유카탄 반도에 상륙했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명령 불복종죄에 해당하는 중죄 행위였다.
어쨌든 그는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후 교두보로 항구도시 베라크루스(Veracruz)를 만들고, 그곳의 마야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당시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원주민들은 무장한 스페인 군을 보고 공포 속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멕시코 내륙으로 진군하던 코르테스는 타바스코(Tabasco) 지역에서 저항하던 원주민들을 물리친 뒤 젊은 여인 20명을 받게 된다. 이 중에는 훗날 그의 정부가 되어 아들까지 낳는 마린체(Malinche)가 있었다. 마린체는 그에게 훌륭한 조언자이자 통역 역할을 했는데, 그의 도움으로 코르테스는 원주민들로부터 서쪽으로 더 가면 아스텍이라는 부유한 왕국이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코르테스 군은 아스텍 왕국과 오랫동안 숙적 관계에 있던 틀락스칼란(Tlaxcalan) 원주민들과 동맹 관계를 맺은 뒤, 1519년 11월 아스텍 왕국의 중심지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에 도착했다. 이때의 코르테스 군은 중간에 보충한 스페인 병력과 원주민 인력까지 포함해 상당한 병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아스텍 왕인 몬테수마 2세(Moctezuma II·재위기간 1502~1520)는 위풍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코르테스의 모습을 보고, 아스텍 전설 속의 신(깃털 달린 뱀 형상을 한 신 케트살코아틀)이 보낸 사자이거나 심지어 신 그 자체로 착각하고 그를 환대했다.
코르테스 일행을 환영한 몬테수마 왕도 곧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그를 유인해 반격을 꾀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코르테스에게 사로잡혀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몬테수마 2세가 코르테스에게 굴복하자 아스텍 국민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뒤 그들의 우상을 파괴하고 왕국의 실력자들을 차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한편 불법 출정에서부터 아스텍 왕국의 침략 등 코르테스의 행동을 반란으로 간주한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1520년 4월 판필로 데 나라바에스(Pa?nfilo de Nara?vaez·1478~1528)에게 군사 1100명을 주어 코르테스를 정벌할 것을 명령한다. 정벌대가 베라크루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 200명의 병사를 남겨놓고, 이들 군과 대항하기 위해 떠났다. 전투 결과 코르테스 측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을 성공적으로 무찌르고 패잔병들을 오히려 그의 군대에 합류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그런데 테노치티틀란 관리를 부탁했던 부관이 원주민 학살을 자행하는 바람에 대규모 원주민 폭동이 발생한다. 코르테스는 사태 수습을 위해 황급히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가 유화책을 쓰려고 했지만 이 와중에 1520년 7월 1일 몬테수마 2세가 자신의 백성들 손에 죽음을 맞는 비극이 일어난다. 스페인 측 기록에 따르면 몬테수마 왕이 코르테스의 부탁을 받고 아스텍 백성들을 설득하는 연설을 하려고 하다가 흥분한 군중의 돌과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었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 목숨을 잃었다. 이때 당황한 코르테스는 그간 획득한 재물도 포기하고 많은 부하를 잃은 채 간신히 도망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전력을 재정비한 코르테스는 곧 반격을 시도한다. 그는 다시 틀락스칼란 원주민들과 합세해 아스텍 왕국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펼쳤다. 코르테스 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한 아스텍은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천연두까지 창궐하면서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천연두는 코르테스를 잡으려는 정벌대가 상륙하면서 전파된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아스텍 왕국의 마지막 보루인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코르테스 군의 공격은 계속됐다. 그리고 1521년 8월 13일 아스텍의 마지막 왕 쿠아우테목(Cuauhte?moc·1495~1525)이 코르테스 측에 사로잡히면서 아스텍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쿠아우테목은 당시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몬테수마 2세의 사촌이었다. 그는 체포당한 후 숨겨둔 보물을 찾으려는 코르테스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 1525년 코르테스에 의해 처형되고 만다.
틀락스칼란 원주민과의 협공
아스텍 왕국을 완전히 정복한 코르테스는 이 지역을 아스텍 옛 민족 이름을 따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명명하고 스페인으로의 복속을 선언한다. 이후 코르테스는 총독이 되어 1524년까지 멕시코를 지배한다. 그러나 화려한 그의 공적에 비해 그의 만년은 순탄치 못했다. 아스텍 왕국 정복 이후에도 그는 온두라스 지역으로의 진출하는 등 계속된 정복 활동을 기도했지만, 점점 강화되는 그의 입지에 불안을 느끼는 반대파의 역풍도 거세졌다. 그 공격의 선봉은 벨라스케스와 스페인 자국의 식민지 행정 책임자였던 후안 로드리게스(Juan Rodr?iguez de Fonseca· 1451~ 1524) 주교였다. 코르테스는 이들의 모함을 피하기 위해,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Carlos V·1500~1558)에게 직접 결백을 주장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결국 코르테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스페인 총독 자리에서 파면됐고, 1528년 스페인으로 소환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코르테스는 왕을 설득한 끝에 뉴스페인 정복에 대한 그의 공적을 인정받았고, 마침내 1530년에 재차 멕시코 땅으로 건너간다. 이후 캘리포니아 만(灣) 등을 발견한 그는 1541년에 다시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코르테스는 생전에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대부분 아메리카 대륙 탐험과 정복 활동에 쓰느라 만년에는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1544년 스페인 왕실에 공적에 대한 보상을 정식으로 청구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3년간 허송세월했다. 실망한 그는 결국 1547년 다시 멕시코로 가던 중 지금의 세르비아 근처에서 폐렴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코르테스 군에 의해 정복된 아스텍 왕국의 역사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 아직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스텍 왕국의 중심을 이룬 부족인 멕시카(Mexica)족은 나후아틀(Nahuatl)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었는데, 6세기경부터 지금의 멕시코 북부 지역에서 멕시코 중앙부(메소아메리카 지역)로 이동해온 것으로 추정한다. 1325년에 테노치티틀란(오늘날의 멕시코시티)이란 늪지 안의 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는데, 아스텍 전설에 의하면 당시 이 섬에서 선인장 위에서 뱀을 잡아먹고 있는 독수리를 보고 이곳을 신이 내린 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전설이 바탕이 된 상징 그림은 멕시코의 국가 문장이 됐고, 오늘날 멕시코 국기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440년 40세의 나이로 아스텍 왕으로 즉위한 몬테수마 1세(Moctezuma I·재위기간 1440~1468)는 아스텍 왕국의 기틀을 확실하게 마련한 지도자였다. 그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해 주변 부족들과 잇달아 전쟁을 치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틀락스칼라(Tlaxcala) 계곡에 살고 있는 부족과의 전쟁으로 강한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훗날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공격할 때 틀락스칼란 원주민들이 그를 도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용설란(龍舌蘭) ‘아가베’
아스텍을 점령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아스텍 문화와 사회 모습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아스텍 문화가 하나님을 모르는 미개한 원주민들의 우매한 관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쨌든 정복자들도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재미있는 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풀케(pulke)’ 또는 ‘옥틀리(Octli)’라고 하는 토속주였다. 이 술은 멕시코 일대에 자생하는 아가베(agave·용설란)라는 식물을 원료로 만든 것이었다. 아가베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멕시코 선인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종류의 식물이다. 아가베는 멕시코 원산으로 키가 1m 이상 자라는 상록다년초다. 잎의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데 그 모양이 전설의 동물인 용의 혀와 닮았다고 해 동양에서는 용설란(龍舌蘭)이라고 명명됐다. 아가베는 10여 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는다. 세인은 다소 과장을 섞어 ‘100년에 1번 꽃이 핀다’고 소개하고 있고, 실제 세기(100년) 식물(century plant)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가베에서는 아구아미엘(aguamiel·꿀물)이라는 10% 정도의 천연 당을 포함한 즙이 분비되는데, 이 즙에 자연 속에 존재하는 천연 효모가 작용하면 저절로 발효가 일어나 풀케가 만들어진다. 풀케는 멕시코 중앙부에서 아스텍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인 서기 200년 전후부터 원주민들이 음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풀케가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던 것이 아스텍인들이 멕시코 중앙부로 이동하고 난 뒤인 1171~1291년 사이에 처음으로 아가베 즙을 이용해 풀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풀케는 알코올이 주는 신비한(?) 효험 때문에 주로 종교·국가 의식에 사용됐다. 당시 아스텍 부족에게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때 의식을 집행하는 제사관들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에게도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풀케를 마시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로 풀케는 왕이나 제사장 등 국가 지도자들 이외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음주가 엄격히 금지됐다.
풀케는 그 후 오랫동안 아스텍인의 문화에 스며들었다. 그들의 신화 속에도 오메토트크틀리(Ometotchtli·‘두 마리 토끼’라는 뜻)라는 주신(酒神)과 풀케의 탄생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아스텍을 정복한 코르테스도 이 풀케를 보고 독특하면서 매우 신기한 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당시 처음으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에게 보낸 보고 편지에서 풀케에 대해 알렸고, 풀케 샘플을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려 했지만 냉장장치 없이 알코올 농도가 4~8%로 낮은 술을 운반할 수도 없었다.
독특한 향에 시큼한 맛을 지닌 풀케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입맛에 맞을 리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멕시코에는 포도가 없어 와인을 만들어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들은 풀케를 증류해 마시기 쉽게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알코올 도수 낮은 발효주인 풀케를 높은 도수의 증류주로 만들려는 시도는 15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데킬라의 형제 격인 메즈칼(Mezcal)이라는 술이었다.
높은 도수의 풀케 증류주, 메즈칼
데킬라(왼쪽)와 메즈칼.
결국 풀케가 아버지라면 메즈칼과 데킬라가 이로부터 나온 두 아들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메즈칼과 데킬라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메즈칼 역시 멕시코에서 용설란으로 만들어지는 증류주라는 측면에서는 데킬라와 같다. 그러나 모든 데킬라는 메즈칼일 수 있지만, 메즈칼은 결코 데킬라가 될 수 없다. 메즈칼이 넓은 뜻에서 용설란으로 만든 증류주의 총칭이라면, 데킬라는 이 중 특별한 용설란으로 특별한 지역에서 생산한 것을 선택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메즈칼이라고 할 때는 데킬라보다 저급한 용설란 증류주를 뜻한다. 그렇다면 데킬라와 메즈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멕시코에서 자생하는 136종의 용설란 중 데킬라는 블루 아가베(blue agave)라는 고급 용설란 한 종만 사용하지만, 메즈칼은 에스파딘(espadin) 품종 등 8종의 용설란을 사용한다. ②데킬라는 블루 아가베의 주산지인 하리스코 주 데킬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데 비해, 메즈칼은 대부분 옥사나(Oaxana)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기타 내수용 제품은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다. ③데킬라는 2,3회 증류하는 데 비해 메즈칼은 1회 증류한다. 다만 최근 고급 메즈칼 제품 중에는 2회 증류한 것도 있다. ④용설란을 구울 때 데킬라는 증기(스팀)를 사용지만 메즈칼은 석탄 오븐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메즈칼에서는 강한 훈제향이 느껴진다. ⑤메즈칼에는 구사노(gusano)라고 하는 벌레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데킬라에는 절대 넣지 않는다. ⑥데킬라에 비해 메즈칼은 대량 생산된다.
메즈칼에 들어 있는 벌레는 정확히는 용설란에 기생하는 나방의 애벌레다. 스페인어로 벌레를 ‘구사노(gusano)’라고 하는데, 애벌레를 넣은 술에는 술병에 ‘con gusano (with worm)’라고 표시한다. 어떤 경우에는 두세 마리를 넣고 자랑스럽게 이를 홍보하는 제품들도 있다.
메즈칼에 나방의 애벌레를 넣게 된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과거 술의 농도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던 시절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애벌레를 넣고, 만일 썩지 않고 잘 보관되면 술이 충분한 알코올 농도로 빚어진 것으로 여겼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또 용설란 처리 과정에서 실수로 들어간 애벌레가 결과적으로 메즈칼의 맛을 좋게 해 계속 사용했다는 설도 있고, 일종의 정력 강장제로 사용됐다는 설도 있다.
메즈칼이라고 해서 모든 술에 애벌레를 넣는 것은 아니다. 일부 고급 제품들은 오히려 애벌레를 넣는 것을 저급한 품질을 숨기려는 상업적 술책으로 격하하면서 의도적으로 데킬라와 같이 애벌레와 무관한 제품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오늘날 실제적으로 멕시코의 술을 대표하는 데킬라에 대해 알아보자. 데킬라는 멕시코 하리스코 주 데킬라 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정 용설란(블루 아가베)을 이용해 만들어지는 제품이다. 따라서 데킬라는 술 이름인 동시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일찍이 데킬라의 상업적 가치를 인식한 멕시코 정부의 노력에 의해 지금은 국제적으로 데킬라 명칭 사용 독점권을 인정받고 있다.
데킬라는 마가리타(Margarita), 선라이즈(Sunrise) 등 세계적인 칵테일의 기본 술로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최근에는 시대 조류에 맞추어 장기 숙성의 고급 제품을 출시하며 스트레이트용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데킬라를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데킬라의 종류에 관해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데킬라는 우선 용설란(agave)으로만 만들어진 ‘100% 아가베 제품’과 용설란 주스와 함께 다른 당을 섞은 혼합액으로부터 증류한 ‘믹스토(mixto) 제품’으로 나뉜다. 믹스토 제품은 적어도 51% 이상의 아가베를 포함해야 한다.
100% 아가베 제품은 ①블랑코(blanco) ②레포사도(reposado) ③아네호(anejo) 3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블랑코는 영어로는 ‘화이트(white)’라는 뜻으로, 증류 후 바로 출하하거나 스테인리스 스틸통(간혹 오크통)에서 30일 이하 저장한 뒤 출하한 제품을 말한다. 이 제품은 대중적인 데킬라 제품으로 스트레이트로 즐길 수도 있지만, 대부분 데킬라 베이스의 칵테일용으로 사용된다.
레포사도는 영어로는 ‘rested’ 라는 의미로, 2개월 이상 나무통에서 저장한 뒤 출하한 제품이다. 아가베의 강한 향이 주를 이루는 블랑코 제품에 비해 감미로운 느낌이 맛을 순화시켜 준다.
아네호는 숙성된(aged) 제품이란 의미다. 이는 600L 이하의 작은 나무통에서 최소 1년 이상 저장한 뒤 출하한 제품을 말하는데, 데킬라 중 최고급 제품이다. 오크통에서 장기 숙성돼 오크통의 부드러운 나무 향이 특징이다. 100% 아가베로 만든 아네호 제품은 당연히 데킬라 중 최고급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값도 비싸다. 고급품인 만큼 스트레이트용으로 음미하며 칵테일용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데킬라 아네호는 흔히 몇 십 년 이상 숙성시키는 위스키나 브랜디와는 달리 오크통에서 3,4년만 숙성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상 나무통에 숙성시키면 데킬라 특유의 아가베 향이 강한 오크통 향에 가려 풍미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 데킬라, 골드 데킬라
믹스토 제품 역시 아가베 제품과 마찬가지로 3가지 종류로 나뉘지만 한 종류가 더 있다. 호벤 아보카도(joven abocado, ‘young and smooth’란 뜻)라는 제품인데, 믹스토 제품 특유의 향을 극복하기 위해 캐러멜 또는 사탕수수를 혼합해 황금빛을 띤다. 블랑코가 흔히 ‘화이트 데킬라’로 불리는 데 비해 ‘골드 데킬라’로 불린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데킬라 제품은 각자 특유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질이나 가격에 관계없이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복합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맛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100% 아가베 아네호 제품을 찾지만, 다소 거칠지만 아가베의 순수한 향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블랑코를 즐겨 찾는다. 이런 측면에서 레포사도 제품은 일종의 절충점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명주 데킬라를 탄생시킨 풀케는 당시 천연 효모를 이용해 발효시킨 후 특별한 추가 가공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의 막걸리와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오늘날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풀케도 탁한 액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맥주와 데킬라의 위세에 눌려 멕시코 국민들 사이에서조차 그 소비량이 많지 않지만 전통을 이으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가베 즙을 대량으로 추출한 뒤 인공 효모로 발효시켜 이를 가공 처리한 캔 제품이 등장했다.
독자 여러분도 멕시코를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풀케라는 술을 한번 맛보는 것이 어떨까. 혹시 아는가. 옛 아스텍 왕국의 숨결이 불현듯 한잔 술에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2. 6월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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