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록

대흥사-2 (2013.0718)

해군52 2013. 7. 27. 21:22

 

천불전은 과거, 현재, 미래에 어느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시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1811(조선 순조 11)에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었다

 

 

이곳 천불은 경주 불석산의 옥돌로 조성했는데

1817년 배로 오던 중 부산 앞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로 표류했다가

다음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되었다고 한다

 

 

 

 

 

용화당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지형을 유지하면서

기둥의 높이를 조정하여 건축한 자연친화적인 건물이다

 

 

천불전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

용화당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 성당 김돈희의 글씨

 

 

 

초의선사는...

 

성은 장()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인 초의선(1786~ 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초의를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정조10)에 태어난 선사는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 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유배생활 하는 24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물론 초의승려는 다산 선생께 다선(茶禪)의 진미를 더하였을 것이다. 다산은 각다고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렇게 두 분을 만나 중흥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펌)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진영을 봉안한 표충사는 유교 형식의 사당이다

 

스님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대왕이 하사한 친필 편액과

임금님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어서각편액도 함께 있다

 

묘향산에서 입적하신 서산대사의 유언에 따라 대흥사에 전해진

대사의 가사와 발우는 대흥사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보 30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만나러 가는 길은

안내가 제대로 없어서 찾기도 어렵고 험한 등산로다 

 

 

드디어 이렇게 높은 산 속에 숨은 용화전을 찾아냈지만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고 견공들만 지키고 있는데

한놈은 요란스레 짖어대고, 한놈은 늘어져있고... 

 

 

잠겨진 문틈으로 들여다 볼 수밖에 없나 싶었는데

이렇게 잠겨진 문을 발견하고는 잠시...

 

 

어렵게 마주한 마애불 앞에 합장하니

자애로운 마애불이 한 말씀 하시는듯...

 

 

용화전을 옆에서 보니

큰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이어붙인 것이 확실하게 보인다

 

 

용화전 옆에 3층 석탑 1

 

 

그리고 더 높은 곳 바위 위에도 3층 석탑 1

 

이렇게 높은 곳에 마애불과 석탑을 만든 이들은 누구이고,

얼마나 간절한 소원을 갖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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