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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01) 폴-로저 샴페인과 처칠 마티니

해군52 2011. 4. 1. 11:19

세계 지도자와 술 (01)

‘위대한 술꾼’ 윈스턴 처칠과 ‘샴페인 금발미녀’오데트의 로맨스

폴-로저 샴페인과 처칠 마티니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에서 얻었다”는 한마디로 세계의 주당들을 허리 숙이게 했던 윈스턴 처칠. 그는 거의 매일 점심에는 맥주를, 저녁에는 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거나 샴페인을 마시는 위대한 술꾼이었다. 오늘날 베르무트 병을 한번 쓱~ 보면서 마시는 것으로 유명한‘처칠 칵테일’과 유명 샴페인 회사 폴 로저(Pol-Roger)의 마담 오데트와의 만남으로 탄생한‘처칠 샴페인’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술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20, 30대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 윗세대는 ‘굵은 시가를 입속 깊숙이 물고 마치 불도그같이 찡그린 얼굴에 손으로는 승리의 ‘V’ 사인을 그리는 사람’하면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에 대항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이 바로 그 사람이다. 처칠의 대표적인 사진에서 보이는 시가 흡연 장면과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얼굴, 그리고 승리의 V 사인은 오랫동안 대영제국의 강인함과 여유로움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실제 처칠은 세계 각종 매체가 선정하는 역사상 위인 목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인물로, 2002년 영국 BBC가 100만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술 얘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처칠의 인생을 조망해보자.

 

윈스턴 처칠은 1874년 영국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독립성이 강하고 반항적인 성격이었던 그의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탓인지 1893년 삼수 끝에 샌드 허스트의 왕립사관학교에 힘들게 입학했다. 처칠은 당시 보병 대신 기병 병과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기병이 보병에 비해 의무 취득 학점기준이 낮았고, 기병 병과에서는 그가 싫어하는 수학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4년 12월 졸업할 때는 150명 중 8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전쟁 특파원으로 높아진 명성…결국 총리까지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일반적인 진급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실제 전쟁 현장을 체험하고 이를 글로 기록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전쟁터에서의 직책을 구했다. 당시 그의 역할은 오늘날의 ‘전쟁 특파원’과 같은 것이었는데, 전쟁터에서 경험한 내용을 신문에 기고함으로써 처칠은 대중적인 관심과 함께 상당한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칠의 첫 해외 근무지는 1895년에 파견된 쿠바였다. 당시 스페인군과 쿠바 게릴라 간 전투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는데, 처칠은 영국 신문에 전선 상황을 기고했다. 이때 처칠은 그의 평생 기호품 중의 하나인 시가에 빠져들었다. 1896년 10월 처칠은 당시 영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인도 봄베이로 전출된다. 그곳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 파슈툰 부족과 영국군이 벌인 격렬한 전투에 직접 참가해 그 경험을 기사로 섰다. 그리고 훗날 이를 책으로 출판했다. 1898년에는 이집트로 파견된다. 처칠은 그곳에서 다시 수단으로 가 실제 전투(옴두르만 전투)에 참전하는데, 이때도 전쟁 특파원으로서 전황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리고 1898년 10월 런던에 돌아가서는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정리해 이듬해 출간했다. 1899년 5월 처칠은 실질적으로 군 생활을 그만두고 정계 진출을 꿈꾸면서 보수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처칠 생애의 가장 큰 전기는 그해 남아프리카에서 발발한 제2차 보어전쟁(1899~1902)에서 마련된다. 1899년 10월 모닝포스트 특파원 자격으로 보어전쟁에 참가한 그는 어느 날 적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처칠은 수용소에서 기회를 엿보다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일약 ‘영국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듬해 총선에서 한 번 낙선했던 올덤 지역구에서 보수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다. 이후 처칠은 낙선과 당선 등 여느 정치인들과 같은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게 되고, 1904년에는 반대당인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발발할 당시 처칠은 해군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한 작전의 실패에 대한 일종의 문책성 인사로 장관직을 그만둔다. 얼마 후 그는 대령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 이후에는 정치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5년 다시 보수당에 합류한다. 1930년대 초 정당 내 알력 때문에 수년간 정치 활동을 쉬게 되었는데 그 기간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여 당시 가장 원고료가 높은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윈스턴 처칠이 생전에 즐겨 마셨던 폴 로저 샴페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1939~45)이 발발하면서 처칠은 1차 세계대전 때처럼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1940년 5월 체임벌린 수상이 전시내각의 임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처칠은 마침내 총리직을 맡게 된다. 이후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영국 국민의 지지도 그만큼 높아졌다.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필력

 

그러나 전후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패배하고 만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처칠이 전쟁 영웅이었지만 국민은 전후 평화적인 국가 재건에는 처칠의 보수당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6년 동안 야당 지도자로 일한 처칠은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총리로 재집권한다. 처칠의 두 번째 총리직은 1955년 4월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식민지의 독립 등 영국의 국제 위상이 예전과 달라지면서 고전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도 뇌졸중 증상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말년에는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등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65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조의를 표했다.

 

이처럼 처칠은 세계적인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 뛰어난 웅변가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와는 사뭇 다른 면모들도 있다.

 

첫째는 그림과 문학에 대한 재능이다. 그는 뛰어난 화가였다. 실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 상당한 작품이 남아 있다. 그의 그림은 유화 작품으로 주로 경치를 그린 것이었다. 처칠은 그림 그리기를 통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 증세를 극복하려고 애썼다는 얘기도 있다.

 

처칠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글쓰기 재능도 빼놓을 수 없다. 처칠은 일생 동안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여주었는데 앞서 말한 수많은 신문 기고문 이외에도 한 권의 소설, 두 권의 전기(傳記), 회고록, 그리고 여러 편의 역사물을 집필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집필 활동 배경에는 경제적인 동기도 있었다. 그는 상류층인 집안 배경과 높은 사회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사치스러운 편이어서 늘 돈이 아쉬웠다. 게다가 처칠의 활동 당시 영국에서는 하원의원이라 하더라도 1946년까지는 아주 적은 명목상 보수만 받았기 때문에(1911년 이전까지는 명목상 보수도 없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많은 의원이 다른 직업을 통해 수입을 충당했다. 아무튼 처칠은 이런 글쓰기를 통해 더욱 명성을 얻어, 마침내 1953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총 6권의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등을 포함한 저작 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런 문학과 예술적 측면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덜 알려진 것이 그의 술에 대한 사랑과 에피소드다. 처칠은 사적이나 공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했는데, 점심에는 주로 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는 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거나 샴페인 등 다양한 술을 즐겨 마셨다. 당연히 술도 센 편이어서 취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술에 관한 관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을 남겼다. 바로 “나는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로부터 얻었다”(I have taken more from alcohol than it has taken from me)였다.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척박한 현실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의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가히 ‘위대한 술꾼’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표현이라 하겠다.

 

 

영국 런던에 있는 ‘처질 박물관 겸 전시 내각 방’(Churchill Museum and Cabinet War Rooms) 내부 모습.

 

최고 경지의 드라이 마티니 ‘처칠 칵테일’

 

이런 ‘위대한 술꾼’에게 술에 대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없을 수 없을 터. 그중 하나가 이른바 ‘처칠 마티니’(Churchill Martini)라고 하는 칵테일 레시피다. 그는 대단한 ‘드라이 마티니’ 애호가로, 마티니를 주문할 때는 혹시 바텐더가 몰래 베르무트(Vermouth)를 타지 않을까 염려해 자기가 볼 수 있도록 베르무트 병을 바에 세워놓고 진(Gin)만을 가지고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처칠 마티니로, 오늘날은 이 칵테일(사실은 진을 그냥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을 마시면서 베르무트 병을 한번 쓱 보는 것으로 베르무트를 탄 것으로 대신하는, 최고 경지의 드라이 마티니 레시피로 소개된다. 그러나 처칠의 술에 얽힌 수많은 일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은 역시 유명한 샴페인 회사 폴 로저(Pol-Roger)의 마담 오데트와의 만남일 것이다.

 

오데트 폴 로저(Odette Pol-Roger·1911~2000) 프랑스 파리에서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의 이름난 장군이었다. 1933년 오데트는 부친이 파리 동쪽에 있는 작은 도시 에페르네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곳에 본사를 둔 유명 샴페인 회사 폴-로저(Pol Roger)의 창업주 손자인 자크 폴-로저(Jacques Pol-Roger)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폴-로저사의 샴페인 마케팅에 적극 참여한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편 가문과 함께 독일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후원했다. 비단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오데트 자신이 자전거를 타고 12시간 걸리는 파리까지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번은 독일 게슈타포에 붙잡혀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1964년 남편 자크 폴-로저가 사망한 이후에도 오데트는 폴-로저사의 경영에 계속 참여했으나 점점 원예 등의 취미 생활에 심취하면서 안온한 노년을 보냈다. 그녀는 이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는데, 그녀의 별칭인 ‘샴페인 금발미녀’(Champagne Blonde)가 이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데트가 처칠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 연합군의 파리 수복 후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였다. 당시 주(駐)프랑스 영국대사 쿠퍼(Alfred Duff Cooper·1890~1954)로부터 처칠을 소개받은 오데트는 그의 정중한 매너와 사려 깊은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처칠 역시 젊고 매력이 넘치는 미모의 프랑스 여인에게 호감이 갔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폴-로저 샴페인을 즐겨 마셨는데, 이날 제공된 1928년산 폴-로저 샴페인은 모임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날부터 당시 70세의 처칠과 33세의 오데트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둔 우정을 이어갔다. 처칠로서는 건강 등의 이유로 우울했을 만년에 일약 생기를 불어넣어준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처칠과 오데트의 역사적 향기가 담긴 샴페인 ‘윈스턴 처칠’

 

파티 이후 파리를 떠날 때 다음에 파리에 올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오데트를 저녁 만찬에 초대하라고 주위에 지시할 정도로 오데트에 대한 처칠의 호감은 대단했다. 오데트 역시 처칠의 생일 때마다 샴페인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빈티지는 그가 좋아했던 1928년산이었는데, 1953년에는 재고가 떨어지자 다른 빈티지(1934년)를 보내는 등 처칠이 사망할 때까지 최상급 샴페인을 보냈다. 처칠은 이에 대한 답례로 그의 사인이 들어 있는 회고록을 보내기도 하고, 한번은 ‘나를 에페르네로 초대하면 직접 발로 포도를 밟아 으깨어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처칠은 아쉽게도 에페르네로 갈 기회는 없었지만 자신이 아끼는 경주마의 이름을 오데트 폴-로저로 붙일 정도로 오데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65년 처칠 사망 후 성 바울 성당에서 거행된 성대한 국장에 처칠의 개인 친구 자격으로 초청받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오데트였다. 처칠의 사후 폴-로저사는 영국으로 수출하는 샴페인 상표에 검은 선을 둘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회사의 최고급 제품에 ‘윈스턴 처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1975년 빈티지로 시작된 이 제품은 피노 누아를 주품종으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처칠가(家)와 영국 황실에만 공급됐다. 감칠맛이 돌면서 숙성된 이 샴페인의 맛은 처칠이 살아생전 좋아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

 

오늘날 윈스턴 처칠 샴페인은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맛을 보면서 처칠과 오데트에 얽힌 역사적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1. 4월호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