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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03) 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해군52 2011. 6. 1. 12:49

[세계 지도자와 술]-03

 

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닉슨과 마오쩌둥의 역사적 만남으로 죽(竹)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이 처음 세계에 얼굴을 내밀 때, 그 현장에는 마오타이주(茅台酒)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작업을 준비했던 보좌관은 “마오타이주를 직접 마시면 곤란하다. 건배 제의가 있더라도 입에 갖다 대는 시늉만 하라”고 건의했지만, 닉슨은 얼굴을 잠깐 찡그린 뒤 술을 다 마셨다. 마오쩌둥이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할 때, 마오타이주의 고장인 마오타이진 주민들은 홍군에게 이 술을 건네며 장정의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1972년 2월21일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오른쪽)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최근 한 일간지에 ‘부끄러운 역사도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제목으로 미국 닉슨 대통령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한 이 글은 1974년 그의 사임을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상설 전시장이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남부 요르바 린다에 있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안에 설치됐다는 내용이었다. 닉슨 도서관장이자 워터게이트 갤러리 큐레이터인 티머시 나프탈리는 “닉슨 대통령이 미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임기 중 사임했다는 걸 고려하면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라는 복합적인 사안들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미국의 제37대(재임 1969~74)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1913~94)은 많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업적에 비해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일례로 200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그때까지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평가 순위에서 닉슨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과 함께 공동 37위를 기록해 여느 여론조사에서와 다름없이 ‘워스트 텐’(Worst 10)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닉슨은 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1953~61)한 뒤 대통령 재선에도 성공한 유일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 첫 재임기간에는 베트남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과 구(舊)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업적으로 1973년 재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1969년 발표한 그의 대아시아 외교 정책은 닉슨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에 널리 알려지며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전도를 결정적으로 망친 것이 앞서 말한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974년 8월9일 대통령직에서 떠난 닉슨은 그 후 내내 미국 역사상 초유의 임기 중 사퇴라는 불명예의 멍에를 지게 된다.

 

닉슨은 1913년 캘리포니아 주 요르바 린다에서 출생했다. 휘티어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듀크대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1937년 캘리포니아에 돌아와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군에서 그는 활약을 인정받아 소령까지 진급했다.

 

부통령과 대통령 각각 재선에 성공한 닉슨

 

종전 후인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하원의원 시절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대표적인 우파 반공주의자로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국무부의 고위 관리였던 앨저 히스의 구소련 간첩 활동 진상 파악도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정치적 명성에 힘입어 1950년 상원의원이 됐고, 1952년 선거에서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1890~1969)의 러닝메이트로 40세의 나이로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는 이어 1956년 선거에서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그야말로 실패를 모르는 승승장구의 정치 과정을 밟는다.

 

1960년 닉슨은 마침내 그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제35대 미국 대통령선거에 도전한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무난히 승리를 거둔 닉슨은 그러나 본선 무대에서 민주당 후보로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1917~63)라는 걸출한 인물을 상대한다. 풍부한 경륜을 앞세운 닉슨과 젊은 피를 앞세운 케네디 간의 대결은 시종일관 접전이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신매체로 선거전에 등장한 후보자 TV토론은 승리의 추를 케네디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결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의 이미지는 토론 내용에 관계없이 닉슨을 압도했다. 더구나 네 번의 토론 중 첫 번째에서는 닉슨의 몸 상태까지 좋지 않았던 탓에 그런 분위기가 더욱 강조됐다. 결국 선거 결과 닉슨은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 불과 0.2%(12만표) 뒤지는 차이로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만다.

 

선거에 패배한 닉슨은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변호사 일과 함께 저작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다 1962년 주위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선거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는 현역 민주당 후보에게 또다시 아픈 패배를 당한다. 많은 정치 평론가는 이번 패배야말로 닉슨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닉슨 자신도 선거 패배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자회견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절치부심하던 닉슨은 오랜 기다림 끝에 1968년 대통령선거에 재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부통령이던 민주당 허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1911~78)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오랜 정치적 꿈을 이루게 된다. 그의 첫 4년간의 재임 기간(1969~73)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의 점진적인 개입 중단과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국제 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 정책에서도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중 사의

 

이런 성과에 힘입어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1922~) 후보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표 차이로 이겼다.

 

그러나 닉슨의 화려한 정치 이력도 여기까지였다. 1973년 초부터 1974년 8월 그가 사임할 때까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언론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 6월 닉슨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비밀요원들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몰래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돼 체포된 사건이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폭로 기사로 일시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이 사건은 처음 백악관 측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황이 속속 드러남으로써 미국 국민의 불신 여론이 높아져갔다. 마침내 1973년 초까지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닉슨의 말까지 거짓말로 드러나고 그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여론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됐다.

 

결국 닉슨은 모든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데다 대통령직에 대한 탄핵안이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가결되는 등 탄핵이 거의 확실시되자 1974년 8월9일자로 자진 사퇴한다. 대통령직 사임 직후 캘리포니아 상 클레멘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 닉슨은 정신적 충격과 비통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9월8일 후임 대통령인 포드(Gerald R Ford·1913~2006)가 내린 사면령으로 후속 조사는 받되 형사 기소는 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포드의 지지율은 71%에서 49%로 대폭 떨어졌다.

 

닉슨은 설상가상으로 사면이 발표된 그날 밤 정맥혈전증과 이로 인한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후에도 병이 재발해 수술까지 받으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1975년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닉슨은 조금씩 대외활동을 재개하면서 이듬해인 1976년 2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시 찾았고 이후 중국을 네 번 더 방문한다. 1980년대 들어서 닉슨은 저작활동을 포함해 특유의 탁월한 통찰력으로 왕성한 대외활동을 하면서 최악의 상태에서 차츰 벗어났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22일 갑자기 닥친 뇌졸중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中蘇 국경분쟁 틈 파고든 닉슨

 

이처럼 굴곡진 닉슨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에 꽃을 피운 대표적 업적 중 하나가 중국과의 첫 외교 관계 수립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0년에 이미 구소련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중국은 닉슨 취임 초기인 1969~70년 중-소 국경분쟁을 겪으면서 공산 블록의 축이었던 구소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닉슨은 이 틈을 이용해 냉전시대 주도권을 서방세계로 가져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위해 닉슨은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개인 채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니콜라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루마니아 대통령과 야히야 칸(Yahya Khan)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중국에 화해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무역 제재 완화와 국내 반대여론 무마 작업 등 치밀히 사전 준비를 해나갔다.

 

그런 미국의 노력에 중국은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을 초청해 양국 간 시범경기를 가지는 형식으로 화답했다. 15명으로 구성된 미국 탁구팀의 공식 방중은 중국 공산화 이후 무려 20년 이상 입국 비자가 거절됐던 미국으로서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의 직접 지시로 시작된 이 이벤트는 이 후 핑퐁외교(Ping Pong di-plomacy)라는 유명한 외교 용어를 탄생시켰다.

 

양국 간의 우호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닉슨은 1971년 7월에 당시 국가안보담당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1923~)를 중국에 비밀사절로 보낸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2년 2월 닉슨의 공식 방중 계획이 양국 간에 합의됐다는 발표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마침내 1972년 2월21일 닉슨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도착하면서 그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시작됐다. 일주일간 계속된 이 여정은 냉전시대의 재편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뿐 아니라, 닉슨 개인으로서도 그의 정치 행로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또 지구촌의 많은 사람에게는 그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죽의 장막 안의 여러 모습을 TV 화면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닉슨은 중국에 도착한 뒤 곧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을 만난다. 일주일의 체류 기간 중 유일한 마오쩌둥과의 이 만남은, 닉슨 도착 9일 전부터 아팠던 마오쩌둥의 건강 상태가 좋아진 시점을 이용해 급히 이루어진 것으로 훗날 파악됐다.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내내 닉슨의 상대역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였다. 뛰어난 공산혁명가이자 탁월한 정치·외교적 수완으로 지금까지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저우언라이는 194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 이후 마오쩌둥 아래서 무려 27년간 총리로 일하며 중국 국내외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오랜 2인자 생활에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오쩌둥을 마지막까지 성실히 보좌했다.

 

 

 

“마오타이는 ‘순수 가솔린’(pure gasolin)”

 

 

그런 저우언라이와 닉슨의 여러 차례 만남 중 매스컴의 가장 큰 이목을 끈 행사는 단연 닉슨 일행의 공식 환영 만찬회(state banquet)였다. 닉슨 방중의 역사적 의미에다가,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겹치면서 만찬장 메뉴도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베이징의 톈안먼 인민대회장에서 성대히 열린 당시 만찬의 메뉴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찬 요리(cold dishes) | 소스로 맛을 낸 오이와 토마토(cold cucumber and tomato with dressing), 짭짤한 닭요리(salty chicken), 채식주의자 햄(vegetarian ham), 푹 삶은 붕어요리(braised crisp crucian carp), 파인애플을 곁들인 오리구이(sliced roast duck with pineapple), 광동식 저장육(Cantonese preserved meat), 오리 저장육 요리(preserved duck), 중국식 햄(Chinese ham), 삼색 달걀 요리(three-color eggs)

 

▶ 뜨거운 요리(hot dishes) | 사천식 죽순과 달걀 흰자 수프(Sichuan bamboo shoot and egg-white soup), 샥스핀 수프(shark′s fin soup with three shredded ingredients), 새우 요리(king prawns in western style), 버섯요리(dish covered with straw mushrooms), 코코넛 소스 닭요리(braised chicken with coconut), 치즈(almond cheese)

 

▶ 다과(refreshments) | 달콤한 완두콩 푸딩(sweet pea pudding), 스프링 롤(fried spring roll), 양지꽃 경단(dumplings of cinquefoil), 튀긴 쌀 케이크(fried rice cake), 빵(bread), 버터(butter), 볶음밥(mixed fried rice)

 

▶ 과일(Fruits) | 칸탈로푸 멜론(cantaloupe), 오렌지(orange)

 

▶ 음료(Beverages) | 마오타이(Maotai), 적포도주(red wine), 칭다오 맥주(Qingdao beer), 오렌지주스(orange juice), 광천수(mineral water), 얼음(ice block), 소다수(soda water), 끓인 물(plain boiled water)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측에서는 미국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햄과 같이 보통 국가 만찬장에서는 보기 힘든 메뉴가 들어가는가 하면, 새우요리는 전통 베이징식에는 없는 음식이었지만 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정보 때문에 추가된 것이었다. 닉슨은 사전에 어느 정도 연습을 했는지 젓가락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사용했다.

 

그런데 이 만찬 메뉴 중에서 단연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중국의 명주 마오타이주(Maotaijiu·茅台酒)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웬만한 서양 국가에서도 그 지명도를 떨치고 있는 이 유명한 술은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술이었다. 이 때문에 닉슨 방중의 사전 작업을 하고 있던 키신저 일행의 한 보좌관은 중국 방문 중 마오타이를 미리 맛본 뒤 그 독한 맛 때문에 닉슨 대통령이 직접 마셔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만찬 시에 마오타이주로 건배 제의가 있더라도 술을 마시지 말고 입을 갖다 대는 시늉만 할 것을 건의하는 전보를 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건의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실제 만찬장에서 저우언라이가 마오타이주로 건배 제의를 했을 때 얼굴을 잠깐 찡그렸을 뿐 술을 마셨다.

 

사실 마오타이주는 모든 애주가가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맛과 향을 지닌 술은 아니다. 장맛이 나는 독특한 향에 독한 알코올 도수의 독주로 닉슨의 방중 당시 이를 맛본 ‘타임’지 기자 막스 프랑켈(Max Frankel)은 마오타이를 ‘순수 가솔린(pure gasoline)’과 같은 술로 표현할 정도였다. 그러나 마오타이주는 그 매력에 한번 반한 사람은 쉽게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풍미를 가진 술이다.

 

그러면 중국이 자랑하는 전설의 명주 마오타이주는 과연 어떤 술일까? 마오타이주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마오타이주의 근본이 되는 중국 백주(白酒·바이지우)에 대한 기초 상식이 필요하다.

 

백주는 수수(고량)를 주 원료로 증류한 백색의 투명한 술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고량주로도 불리고 있으나 이는 백주의 주재료를 강조한 것으로 사실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물론 고량만을 재료로 만든 백주도 있지만 많은 경우 고량 이외에 여러 가지 곡물을 섞어서 만든다.

 

백주를 이해하려면 향형(香型)의 종류에 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향형이란 글자 그대로 ‘향의 종류’란 뜻인데, 백주에는 모두 5가지의 주요 향형이 있다. ① 농향형(濃香型) ② 장향형(醬香型) ③ 청향형(淸香型) ④미향형(米香型) ⑤ 기타, 겸향형(其他, 兼香型)이 그것이다. 이 향형은 일부 저급 백주 이외의 대부분 백주 제품의 상표에 표시돼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술이라도 미리 기본적인 맛을 알 수가 있다.

 

오량액(五粮液), 수정방(水井坊), 공부가주(孔府家酒) 등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중국 술은 대부분 농향형 백주이지만, 마오타이주는 장향형에 속한다. 장향형 백주는 글자 그대로 장맛과도 같은 깊은 맛이 느껴지는 술이다.

 

장맛처럼 깊은 맛 내는 장향형

 

마오타이주는 중국 구이저우(貴州)성 런화이(仁懷)현의 마오타이(茅台)진에서 생산되는 술을 일컫는다. 적수하(赤水河) 강가에 위치하는 마오타이진은 청나라 시대부터 이미 양조 마을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중국의 고시(古詩) 중 ‘비온 뒤 독을 열면 그, 향기 10리에 퍼지네(雨過開甁十里芳)’라는 구절은 마오타이주의 명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마오타이주는 고량을 주원료로 자연 당화 발효제인 대곡(大曲·밀로 만든 누룩)을 사용해 만든 술이다. 누룩은 원료인 고량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여러 차례 발효 과정을 거친 뒤 술을 거를 때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사용한다. 증류해 거른 술은 일정 기간 저장한 뒤 배합 과정을 거친다. 이 배합 과정은 코냑의 마히아쥐(mariage)와 비슷한 개념으로, 적당한 향과 맛을 위해 많게는 수십 종의 원료를 혼합한다. 배합이 끝난 술은 항아리에 밀봉한 채 장기간 숙성 과정을 거친다. 일반적으로 모든 마오타이주는 3년 이상의 숙성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급품일수록 더 오랜 숙성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장기 숙성을 시키더라도 항아리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오크 나무통 숙성을 거치는 코냑이나 위스키와 같이 술 색깔이 변하지는 않는다.

 

마오타이주가 본격적으로 외부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림)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마오타이주는 이 박람회에서 최우수 품질을 의미하는 금상을 획득함으로써 일약 국제적인 명주로 자리매김한다.

 

마오타이주는 홍군(紅軍)의 장정(長征·1934~36)과도 인연이 깊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홍군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부 장시성에서 산시성까지 9600㎞의 거리를 걸어서 탈출한 이 역사적인 여정은 오늘날 중국 정부를 출범시킨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바로 이 장정 중 홍군이 마오타이진이 있는 적수하를 건널 때 주민들이 마오타이주를 들고 나와 지친 병사들을 위로한 것으로 전한다. 병사들이 이런 주민들의 정성과 술기운에 크게 고무됐으며, 이런 일화 때문에 훗날 중국 공산당 정권이 출범했을 때 마오타이주는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됐다고 한다.

 

연간 생산량 2만5000t

 

이렇듯 마오타이주는 현 중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생산, 판매의 측면에서는 연간 생산량이 수십t을 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건국 후 1952년 열린 제 1회 중국 전국주류품평회를 시작으로 각종 대회에서 금장을 수여받으면서 이른바 ‘중국 8대 명주’ 중 으뜸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생산량도 점차 늘어나 2003년 처음으로 연간 생산량 1만t을 넘긴 마오타이주는 현재 연간 약 2만5000t가량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 들어 프랑스의 유명 코냑 회사인 카뮈사와 손잡고 해외 판매망을 구축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홍보에 나서고 있다.

 

마오타이주는 그 명성에 걸맞게 많은 이야기를 낳고 있다. 2010년에는 인구 밀집과 환경오염으로부터 마오타이주를 지키기 위해 구이저우성 지방 행정 당국이 ‘주민 1만6000명을 2015년까지 인근에 새로 조성한 주거지역으로 이주시키기로 했다’는 계획이 한 언론매체에 보도됐다. 또 희귀 마오타이주의 경우 최근 중국 경제성장과 맞물려 천문학적인 가격에 경매되는 일이 종종 보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명성과 인기에 비례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짜 상품이 횡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중국 면세점에서도 가짜 마오타이주를 팔고 있다는 소문이 있고, 일반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마오타이주의 대부분은 가짜라는 이야기는 이 국제적인 술의 명성에 큰 누가 되고 있다.

 

어쨌든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 전통의 명주를 볼 때마다 역사적 미중 수교의 무대를 장식했던 그때의 화려했던 모습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1. 6월호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