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도자와 술 (09)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기억하는 술, 포트와인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발발로 영국이 프랑스산 와인 수입을 중단하면서 포르투갈 와인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이즈음 영국 수입상의 눈에 포르투갈 와인이 눈에 띄었다. 바로 ‘포트와인’이라고 불리는 ‘강화와인(fortified wine)’이었다. 이 와인은 일반 와인과는 달리 알코올 도수가 높은 단맛이 강한 와인이었다. 이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높아 장기간 항해에서도 술이 상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대양 항해에서는 더없는 장점을 가진 술이었다. 우리도 과거 오랫동안 포도주라고 하면 단맛이 강한 붉은색의 술을 떠올렸다.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 일본에 먼저 소개된 포트와인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
투우와 축구 그리고 플라멩코 등으로 상징되는 스페인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정열의 나라로 각인된 나라다. 그런데 스페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곳만큼 종교, 정치적으로 현격한 변화를 겪은 국가도 흔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 기간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스페인은 게르만 일족인 서고트족(族)의 남하로 한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다가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 이슬람 군대가 처음 스페인 땅에 발을 디디면서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킨다.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걸쳐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후 기독교 세력에 의한 실지(失地) 회복을 위한 재정복(레콩키스타) 시도가 이어진다. 부부 관계가 된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이사벨과 아라곤 왕국의 태자 페르난도에 의해 1492년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라나다가 함락됨으로써 마침내 레콩키스타가 완성된다. 같은 해 여왕 이사벨의 지원으로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스페인 황금시대를 열기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들의 다섯 아이를 포르투갈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영국 등으로 보내 결혼시킴으로써 유럽 왕실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사벨(1504년)에 이어 페르난도(1516년)가 죽자 손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1516년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탄생이다.
‘비운의 왕’ 카를로스 2세
그런데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서는 마지막 스페인 왕이 되는 카를로스 2세(1661~1700, 재위 기간 1665~1700)가 문제였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35년의 짧지 않은 재위 기간을 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비운의 왕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병약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러 심각한 증상을 보였던 그에 대해 후세의 학자들은 말단비대증과 선천성 매독, 그리고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결혼 풍습 때문에 조상의 정신질환 인자가 더욱 강화돼 유전된 결과로 분석한다. 이 때문에 그의 생애는 제대로 된 삶이었다기보다는 오랜 유아 기간을 거쳐 바로 병적인 조로 상태로 들어가면서 생을 마감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개인적인 문제에 겹쳐 그를 정치적으로 더욱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가 불과 만 세 살을 넘긴 1665년 부친 펠리페 4세가 사망한 것이었다. 펠리페 4세는 두 번의 결혼으로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정작 그가 사망했을 때는 심신이 매우 허약한 카를로스 2세만 생존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된 그의 초기 집권 10년은 어머니 마리아(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 3세의 딸)가 섭정을 하기도 했지만 집권 내내 그가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기는 애초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후사가 없었다.
어쩌면 한 개인의 불행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의 배경이 장차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라는, 당시 유럽뿐 아니라 신대륙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 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세력균형 놓고 벌인 치열한 신경전
결국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가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스페인 왕실과 이웃 강대국들은 카를로스 2세 생전에 이미 그의 후계자 문제에 첨예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으로서는 본국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이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 지금의 벨기에 지역, 필리핀,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장 속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당시 카를로스 2세의 남자 형제들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의 여자 형제 가계에서 후계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혈연으로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의 아들인 루이였다. 그런데 그는 바로 ‘태양왕’으로 불리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아들로, 그때 벌써 프랑스 황실의 황태자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다면 이는 부르봉 왕가와 스페인 왕국이 합쳐져 전체 유럽의 균형을 무너뜨릴 거대한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과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을 표방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영국 등 주변 국가들이 용납할 수 없었다.
같은 논리로 루이 황태자의 대안으로 거론됐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1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카를로스 2세와 사촌지간으로, 그의 어머니가 카를로스 2세의 선친 펠리페 4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왕위가 계승돼야 한다는 펠리페 4세의 유언과도 맞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경우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이 합쳐지는 또 다른 거대 세력이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강력한 후보로 등장한 사람이 1692년생으로 당시 어린 나이였던 바이에른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였다. 그는 레오폴드 1세의 외손자였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계 혈통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당시 유럽의 두 거대 가문인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접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를 적극 지지했다.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주변 국가들의 우려를 해소할 대안으로 루이 황태자 대신 그의 아들인 앙주 공작 필립과, 레오폴드 1세 대신 그의 아들인 카를 대공(Archduke Charles)을 각각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내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카를로스 2세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후계자가 되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1699년 요제프가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천연두 때문에 그만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프랑스와 영국은 긴급 회동을 하고 스페인 왕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공에게 넘겨주되, 스페인의 이탈리아 영토를 프랑스가 차지하는 분할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회담에서 제외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이탈리아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스페인으로서도 그들의 국외 영토가 프랑스로 넘어가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렇지만 스페인으로서는 어쨌든 왕위를 부르봉 왕가에 넘기느냐 합스부르크 왕가에 넘기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부르봉 왕가 지지자가 다수를 차지해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작 필립이 이탈리아를 포함한 스페인 전체 영토의 공식 후계자로 결정됐다. 다만 스페인으로서는 부르봉 왕가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만일 필립이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경우 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Duc de Berry Charles)이나 그 다음 순위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기도록 했다.
1700년 오랜 병마에 시달리던 카를로스 2세가 채 마흔이 되지도 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립 앙주공(公)이 정식으로 펠리페 5세로서 스페인 국왕에 즉위한다. 그런데 야심에 찬 루이 14세는 손자인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 즉위를 계기로 유럽 전체의 주도권을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그 일환으로 그는 스페인에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중요한 무역항로의 차단으로 자국의 이익이 심각하게 손상될 위기에 처한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당시 영국 왕은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1650~1702, 재위 기간 1689~1702)로 1688년 명예혁명으로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1633~1701, 재위 기간 1685~1688)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와 함께 강대국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인 협상 끝에, 1701년 9월7일 ‘덴 하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핵심은 “펠리페 5세의 정통성은 인정하되 영국과 네덜란드의 스페인 교역권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대가로 그토록 바라던 이탈리아 영토를 할양받는다는 조건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vs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런데 조약이 체결된 지 며칠 후에 당시 윌리엄 3세에 의해 쫓겨나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제임스 2세가 사망했다. 그러자 윌리엄 3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루이 14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제임스 2세의 아들(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을 새 영국 국왕으로 공식 인정하겠다고 선포한다. 이미 유사시를 대비해 군대를 모으고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루이 14세의 이런 언동이 국민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더욱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영국은 윌리엄 3세가 전쟁 발발 이듬해인 1702년 사망하게 되지만, 그의 후계자인 앤 여왕(Queen Anne) 시대에도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게 된다.
어쨌든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이 한편이 되고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그 상대편이 되는 전쟁이 발생하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후세에 스페인 계승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으로 불리는 전쟁이다.
개전 초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명장인 사보이 공작 오이겐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스페인령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을 침범한다. 그러나 개전 초기 전반적인 전황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진행됐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후 1704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북상한 오이겐 부대와 독일 쪽으로 남하한 영국의 말버러가 이끄는 군대가 블렌하임(Blenheim) 전투에서 프랑스, 바이에른 연합군을 협공해 이김으로써 국면을 전환시켰다. 영국군은 또 같은 해 포르투갈 연해에서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스페인 지브롤터를 장악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후 1705년은 교착상태가 유지됐다.
숙성 중인 ‘샌드맨 포트’ 와인.
그러다가 1706년 오스트리아-영국 동맹군은 큰 전과를 올린다. 이탈리아 전선의 오이겐과 네덜란드 전선의 말버러가 각각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1707년에는 마침 그때 북구에서 발생한 또 다른 전쟁(the Great Northern War) 때문에 스페인 계승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는다. 그러나 1708년 영국-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말버러와 오이겐의 활약으로 우드나르드(Oudennarde)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다. 이 전투의 패배로 큰 곤경에 처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부득이하게 강화 교섭을 시작한다. 그는 동맹군에 정전을 하면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제외한 스페인과 스페인 관련 영토에 대해 프랑스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협상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동맹군 측은 한술 더 떠 루이 14세에게 그의 손자이기도 한 스페인 펠리페 5세를 직접 퇴위시키라고 압박한다. 이런 치욕적인 요구에 대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루이 14세는 끝까지 항전을 결의한다.
이후 전쟁은 계속되고 1709년 오이겐과 말버러의 동맹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격해 프랑스의 빌라르 공작(Duke de Villars)이 이끄는 방어군과 맞선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무려 2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하는 등 전력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이러한 손실로 동맹군 세력이 주춤해지면서 이후 전쟁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집권 토리당은 평화정책 추구
1710년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동맹군 작전도 별 성과 없이 끝났을 때 영국 정국은 큰 변화를 맞는다. 전쟁에 적극적이던 휘그당 내각을 대신해 구성된 토리당 내각은 평화 정책을 추구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영국군을 이끄는 말버러의 국내 정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그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앤 여왕과 그의 부인 사이의 밀착관계가 깨지고 만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말버러는 그 이듬해 말 자리에서 파면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1711년에는 오스트리아 요제프 1세가 갑자기 죽고 그 뒤를 이어 카를 6세가 즉위하는 등 중요한 정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명확하게 승부가 나지 않는 오랜 전쟁과 관련국들 내부의 정세 변화로 자연스럽게 전쟁 종결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1711년 영국과 프랑스의 교섭을 계기로 강화 협상이 시작됐다. 이 사이 프랑스는 조금씩 전력을 회복하면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한다. 어쨌든 협상 결과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 네덜란드 동맹군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끝난다. 다만 그 후에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 전쟁은 계속됐으나 이 전쟁도 다음해인 1714년 라슈타트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으로서의 지위는 인정받았으나 향후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은 영원히 포기해야 했다. 또 그는 스페인의 해외 영토에 대한 기본적인 권한을 얻었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를 오스트리아에 양도하고, 시칠리아와 밀라노의 일부를 사보이아에, 그리고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더구나 영국은 30년간 소위 아시엔토(asiento)라 불린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독점적인 노예 무역권을 확보하는 소득도 거두게 된다.
반면 프랑스 영토는 별 변화가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영토를 17세기 중반 영토로 축소해 라인강 저지대(지금의 베네룩스 삼국 지역)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프랑스는 영국에 대해 자국에 망명해 있으면서 왕권 복위를 노리는 전 제임스 2세의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대신 현재의 앤 여왕을 영국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프랑스는 또한 북아메리카의 다양한 식민지 영토를 잃었다. 루퍼스랜드(Rupert′s Land)와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 대한 영국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세인트 키츠(Saint Kitts) 섬의 절반과 아르카디아(Arcadia)를 양도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손에 넣었으며, 스페인령 헬데를란트(Gelderland)를 합병하는 것이 허가됐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에도 프랑스와 스페인은 같은 부르봉 왕가 계열로 지속적인 동맹자로 남았지만,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영토를 상실해 많은 힘을 잃은 스페인은 오랫동안 유럽 정국에서 발언권을 잃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발언권 잃은 스페인
카를로스 2세가 병약하게 태어난 것이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14년간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원인이 되었듯이,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역시 전쟁 의도와는 관계없이 특정 술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 와인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기후 관계로 자국 내에서는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 수 없었던 영국은 남쪽에 위치한 와인 생산 국가들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지역적으로 영국과 가까운 이점이 있어 영국 사람들은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을 클라렛(Claret, 클라레)으로 부르며 즐겨 마셨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충돌도 잦았다. 따라서 영국의 와인 수입업자들은 오래전부터 프랑스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프랑스산 와인의 수입이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해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여기서 가장 좋은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영국과 어느 정도 가까운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생산하는 와인의 질도 우수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이전에도 포르투갈 와인은 영국에 간간이 수입돼 프랑스 와인 대체품으로 쓰이곤 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 계승전쟁의 발발로 영국의 프랑스산 와인 수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면서 포르투갈 와인에 대한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즈음 영국 수입상의 눈에 포르투갈 와인이 들어왔다. 바로 포트와인이라고 불리는 ‘강화와인(fortified wine)’이었다. 이 와인은 일반 와인과는 달리 알코올 도수가 높은 단맛이 강한 와인이었다.
사실 왕위계승 전쟁 이전에도 이미 영국에서는 포트와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1678년 영국의 와인 상인들이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포트와인을 처음 보고 영국에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포트와인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왕위계승 전쟁으로 프랑스산 와인 수입이 전면 금지되면서부터였다. 더구나 1703년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메수언(Metheun) 조약으로 포르투갈 와인에 대한 관세가 대폭 줄면서 더욱 많은 포트와인이 수입된다. 이후 포트와인은 영국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영국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큰 성장세를 기록하게 된다. 이 때문에 “포트와인의 어머니는 포르투갈이지만 아버지는 영국이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사실 ‘포트(Port)’라는 말도 영국식 용어여서 원래 포르투갈 식으로는 생산지를 딴 ‘포르토(Porto)’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이 맞다.
브랜디 첨가 시점에 따라 3가지 와인 탄생
그런데 포트와인은 일반 포도주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높기 때문에 장기간 항해에서도 술이 상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어쨌든 포트와인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통해 영국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이후 대영제국의 찬란한 시기를 누린 영국에 의해 전 세계에 소개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럼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포트와인이라는 술은 과연 어떤 술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포트와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화와인이라는 와인 종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와인들은 보통 12~15% 정도의 알코올 농도를 보인다. 이는 효모의 작용으로 포도당에서 알코올이 만들어질 때 보통 이 이상의 농도에서는 더 이상 효모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와인 중에 알코올 도수를 일반 와인보다 의도적으로 높게 한 것이 바로 강화와인이다. 알코올 농도를 인위적으로 강화한 와인이라는 뜻이다. 강화와인의 알코올 농도는 보통 17~24% 사이다.
강화와인에서 알코올 농도를 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알코올은 주로 브랜디인데, 이를 첨가하는 시점에 따라 크게 다음과 같은 3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뮈타지(mutage)란 것으로, 이는 발효 전의 신선한 포도 과즙에 알코올을 첨가한 형태다. 따라서 이후 발효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형태의 강화와인은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데 뱅 드 리퀘르(vins de liqueurs)라고 부른다. 둘째는 조기 강화와인(early fortification)이다. 이 형태는 일단 발효가 시작되고 나서 적절한 때에 알코올을 첨가한 와인을 말한다. 이때 알코올을 첨가하는 정확한 시점에 따라 강화와인의 특성이 결정된다. 포트와인과 프랑스의 뱅 두 나튀렐(vin doux naturel, VDN)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술이다. 포트와인의 경우 보통 발효 후 알코올 농도가 6~8% 가 되었을 때, 그리고 뱅 두 나튀렐의 경우 5~10% 사이에서 브랜디를 첨가한다. 뱅 두 나튀렐에는 뮈슈카(Muscat) 포도나 그레나슈(Grenache) 포도를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만기 강화와인(late fortification)이 있다. 이 형태는 발효가 완전히 끝난 후 알코올을 첨가하는 형태로, 스페인의 유명한 세리와인이 대표 제품이다.
포르투갈 내에서 포트를 생산하는 지역은 포르투갈의 제2 도시인 포르토(Porto)다. 이 도시는 대서양으로 바로 연결되는 두오로(Duoro) 강이라는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는데, 지금도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포트란 용어도 결국 이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포트 생산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이 도시 맞은편에 두오로 강과 연해 있는 빌라 노바 데 가이아(Vila Nova de Gaia)라는 작은 마을이다. 어쨌든 포트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포트라는 애매한(?) 외래 용어 대신 포르토라는 자국 고유의 용어 사용을 강력히 고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리지널 포르투갈산 포트와인에는 모두 제품명에 ‘Port’ 대신 ‘Porto’란 명칭이 적혀 있다.
포트와인은 감로와도 같은 매혹적인 단맛으로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식후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포트란 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복잡하게 여러 종류가 있어 금방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트와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종류에 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포트와인은 색깔에 따라 ‘화이트 포트(White Port)’와 ‘레드 포트(Red Port)’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청포도로 만든 화이트 포트는 최근 개발된 제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그 맛에서도 전통적인 레드 포트와는 차이가 많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포트와인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레드 포트 제품을 뜻한다.
레드 포트의 종류는 다소 복잡한데, 일단 생산연도가 표시된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으로 크게 나누어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생산연도 표시가 없는 제품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색깔에 따라 ‘루비(Ruby)’와 ‘토니(Tawny)’라는 두 종류가 있다.
루비는 글자 그대로 루비와 같이 밝은 적색이 나는 포트를 말한다. 이러한 색깔은 큰 나무통에서 비교적 짧게 숙성시켜 와인의 산화가 덜 일어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맛도 다음에 설명하는 토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신선하고 산뜻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토니는 루비와 다르게 작은 나무통에서 적극적으로 산화 과정을 거치게 한 제품으로 숙성 기간도 상대적으로 길다. 따라서 술의 색깔도 황갈색(토니)을 띤다. 맛도 깊고 루비에 비해 묵직한 느낌을 준다. 토니는 장기 숙성이 가능해 시장에는 회사에 따라 10년, 20년, 30년, 40년 숙성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다음으로 포트와인 중에서 생산연도가 표시되는 종류가 있는데, 여기에는 ‘빈티지 포트(Vintage Port)’와 ‘LBV(Late Bottled Vintage)’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최고급 포트와인 ‘빈티지 포트’
먼저 ‘빈티지 포트’는 포트와인의 꽃으로도 불리는 최고급 포트와인이다. 이 술은 특정 연도(빈티지)의 포도를 엄선해 만든다. 양조 후에는 나무통에서 2년 정도 숙성시킨 뒤 병입하는데, 이때 별도의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효모 등 와인의 성분이 그대로 살아 있어 병 속에서도 계속 숙성이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LBV’는 글자 그대로 앞서 말한 정식 빈티지 제품에 비해 병입을 늦게 한 제품을 말한다. 즉 보통 나무통에서 4~7년 숙성시킨 후 병입을 한다. 이 술은 보통 병입할 때 이미 여과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병입 후에는 숙성 과정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다. 오랫동안 보관해야 하는 빈티지 포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상업적 절충 제품으로 볼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는 포트와인 이외에도 이베리아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 마데이라(Madeira)에서 생산되는 비슷한 성격의 강화와인도 있다.
현재 다양한 종류의 포트와인이 국내에도 수입되고 있기 때문에 관심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입해 맛볼 수가 있다. 또 국내외 항공사 항공기 대부분의 비즈니스석 이상에서는 식후주로 포트와인을 서빙하고 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식후에 포트와인을 한잔 음미해보는 게 좋겠다. 대항해 시대의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감미로운 향이 느껴질 것이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1. 12월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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