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02/문화일보)

해군52 2012. 4. 10. 10:56

감성의 神 남인수 - 가요계의 紳士 현인 ‘서바이벌 게임’

(2) 남인수-현인, 노래대결 빅쇼 전설이 되다

 

남진-나훈아, 김건모-신승훈, 그리고 원더걸스-소녀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라이벌이 있다. 라이벌로 인해 가요도 진화한다. 프로가수들의 라이벌전을 확대한 것이 최근 유행하는 ‘위대한 탄생’‘나는 가수다’‘불후의 명곡’ 같은 서바이벌 가요프로다.

 

‘낙화유수’는 1942년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로 탄생했다. 인생의 정한(情恨)을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았을까. 당시 한국 최고의 절창 남인수(그림 위)는 이 노래를 참으로 애틋하게 불러 다시 한번 정상의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유수(流水) 같은 세월을 무엇으로 막겠는가. 정상에 오르면 누구나 내려오게 마련이다.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 불후의 명곡으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떠오르는 태양’ 현인(아래). 오토바이에 엔진이 걸리면 오토바이는 달리게 된다. 현인이 그랬다. 그의 인기는 멈출 줄 몰랐다. 최전성기의 현인은 남인수와 함께 당시 가요계 양대 산맥을 이룬다.

 

“남인수와 현인, 두 사람이 한무대에서 노래 대결을 한다면 누가 승산이 있을까?” “그야 해봐야 알겠지.”

 

팬들 사이에 여론이 들끓자 두 가수를 한무대에 올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빗발치는 팬들의 요구 때문이었을까. 1959년 두 사람은 한무대에 오른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등지에서 화려한 경연이 펼쳐졌다. 그해 봄날 부산극장, 남인수 응원단장에는 막둥이 구봉서, 현인의 응원단장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나섰다. 지휘는 작곡가 박시춘.

 

“결국 두 사람이 붙게 됐군. 누가 더 노래를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볼 만한 구경거리야.”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표부터 서둘러 예매하기 시작했다. 공연 며칠 전부터 입장권이 매진됐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극장 앞은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무대 오른쪽 좌석은 남인수 팬, 왼쪽 좌석은 현인 팬들로 좌석은 둘로 갈렸다. 막이 오르자 남인수는 오른쪽 무대 마이크 앞, 현인은 왼쪽 마이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 응원단장들의 열띤 응원 속에 도전자 현인이 먼저 노래를 불렀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 장기인 현인이 ‘신라의 달밤’으로 서곡을 장식했다. 이에 남인수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가거라 삼팔선’으로 맞대응했다. 다시 현인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면 남인수는 ‘청춘 고백’을, 그렇게 두 사람은 열곡씩을 주고받았다. 열광하는 팬들의 환호와 터져 나오는 박수갈채, ‘앙코르! 앙코르!’로 무대는 후끈 달아올랐다. 객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전자 현인은 챔피언 남인수를 새로운 창법으로 거세게 몰아쳤다. 챔피언은 정교한 세련미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무대를 압도해나갔다. 막상막하로 치닫던 두 사람의 노래대결은 남인수가 열한 번째 노래로 ‘꼬집힌 풋사랑’을 부르고 이어서 ‘낙화유수’를 부르면서 대세는 챔피언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낙화유수’를 일컬어 쇠패영락(衰敗零落)에 비유했던가. 인생무상? 세월은 덧없이 허무하다. 그렇다고 어찌 영탄만 할 수 있겠는가. 지는 꽃에도 정이 있고, 흐르는 물에도 정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풍류와 서정 또한 인생의 시가 아니겠는가. 하늘이 베푼 축복 속에서 자연과 인생은 어우러져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무지개 같은 꿈을 찾아 설레는 가슴 안고 인생은 출발한다. 나루에 배를 띄워 사랑을 구가하고 청춘을 예찬한다. 이뿐만 아니라 행복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고뇌와 고통, 비애와 비통함이 인생살이에서는 더 길기 때문이다. 이 모든 감정을 담은 남인수의 노래는 신기에 가까웠다. 라디오가 없던 시절, 녹화를 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그 양반을 도저히 못 당하겠더란 말이야. 정말 타고난 가수야. 백년에 한 번 탄생하기 힘들다는 불세출(不世出)의 가수 말이야. 어찌나 잘 부르던지….”

 

1992년. ‘정두수 하동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현인 선생께서 필자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그때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대(大)가수는 역시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 깨끗이 승복할 줄 아는 미덕과 겸손함의 진면목을 보여준 신사 중의 신사 현인. 그 못지않게 곧고 바르게 살다 간 전설의 가수 남인수. 가요황제 이전에 훌륭한 인간적 면모가 사람을 반하게 하는 분들이었다. 둘 다 사람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한 천재가수. 두 라이벌의 빈자리는 그래서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