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도자와 술 (20)
전쟁에는 져도 술 元祖 전쟁에는 질 수 없다
피스코 둘러싼 페루-칠레 전쟁
아타카마 사막의 자원 분쟁이 격화돼 일어난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큰 재미를 본 나라는 칠레다. 칠레는 볼리비아로부터 아타카마 사막을 빼앗고 엉거주춤하게 볼리비아를 지원한 페루로부터도 영토를 할양받았다. 그리고 페루의 수도를 함락하고 국보급 문화재도 약탈해갔다. 이러한 칠레가 아타카마 지역에서 생산되는 술 ‘피스코(Pisco)’를 수출해 명성을 얻자, 페루는 피스코가 페루 고유의 술이라며 국가 자존심을 걸고 맞서고 있다. 같은 언어,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전쟁이 남긴 앙금 때문에 사사건건 부딪치는 양국의 술 전쟁을 살펴본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 도발로 한일관계가 전례 없이 악화되고,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관계는 전쟁 전야를 방불케 한다. 작은 섬 영유권을 놓고 이렇게 싸우는데 육지 영유권을 놓고는 얼마나 다툼이 심하겠는가. 남미에서는 영토 싸움으로 바닷길이 막혀 내륙국이 된 나라가 있다. 그때 생긴 앙금이 해소되지 않아 두 나라는 사사건건 부딪치는 앙숙이 되었고 급기야 술 상표권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분쟁을 벌이고 있다.
페루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엘콘도르파사(El Condor Pasa)의 땅이자,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황금 야욕을 부추겼던 엘도라도의 땅으로 알려진 잉카문명의 발원지다. 잉카제국은 16세기 200명도 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 온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앞에 무너져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칠레를 해방시킨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 장군이 리마에 들어와 페루 독립을 선포하고, 산 마르틴의 동맹 요청을 받은 콜롬비아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가 리마에 입성해 아야쿠초 전투(1824)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함으로써 페루는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페루의 운명을 바꾼 태평양전쟁
페루와 칠레는 태평양 연안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이웃해 있으면서 같은 언어, 비슷한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는데도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많다. 왜 이렇게 됐는가. 19세기 독립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두 나라는 잉카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지만 두 나라의 인종 구성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페루는 원주민 54%, 원주민과 백인 혼혈인 메스티소가 34%인 ‘인디오의 나라’다. 반면 칠레는 스페인계 메스티소와 백인이 95%이고, 인디오는 3%에 불과하다. 인디오가 많아 잉카제국의 직계를 자처하는 페루 국민의 눈에는 정복자인 백인의 후손이 주를 이룬 칠레가 근본적으로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1879년 발생했다. 바로 ‘태평양전쟁(1879~1883)’이다. 이 전쟁은 영어로 ‘War of the Pacific’으로 명명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촉발한 태평양전쟁(the Pacific War)과 구별하고 있다.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3국이 아타카마 사막 일대의 자원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볼리비아는 칠레와 페루를 완벽히 가르며 태평양에 접해 있었다(지도 1 참조). 그런데 태평양에 면한 페루 남부에서 볼리비아 해안으로 이어지는 아타카마 사막에서 비료로 사용될 수 있는 구아노(guano)와 화약에 쓰이는 질산칼륨(초석·硝石)이 대량 매장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구아노는 바닷새의 배변물이 퇴적·경화돼 생겨난 천연비료로 ‘조분석(鳥糞石)’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타카마 사막의 대부분은 볼리비아의 영토인데, 볼리비아의 중심부인 내륙에서는 높디높은 안데스 산맥이 있어 이 사막으로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 사막에는 은도 많이 매장돼 있어 183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자본이 칠레 노동자를 동원해 채굴작업에 나섰다. 이곳에서 초석과 구아노까지 발견되자 칠레는 노골적으로 이 사막을 욕심냈다. 칠레는 협상을 통해 볼리비아로부터 개발권을 양도받았다. 동시에 세제상의 혜택도 누렸다.
잠깐의 승리, 긴 패배
피스코
칠레의 독주를 탐탁지 않게 본 라이벌 페루가 1870년 아타카마 사막에 연해 있는 자국 남부의 초석 채굴사업을 국유화하고, 1873년에는 칠레 몰래 볼리비아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페루는 칠레가 유사시 볼리비아의 해안선을 확보하기 위해 군함을 사들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에 이러한 조치를 서둘렀다.
그런데 1873년부터 칠레 경제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밀이나 구리 등 전통적 수출품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고 은 채굴량도 감소했다. 칠레 대통령 핀토가 1878년 “새로운 광물을 발견하거나 사업을 하지 못하면 칠레 경제는 최악의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경제 역시 나빠졌다. 마침내 1878년 볼리비아 의회가 칠레 초석 회사에 대해 세금을 올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회사의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칠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양쪽의 신경전이 거듭되던 1879년 2월 14일 볼리비아 정부는 칠레 회사를 압류해 경매에 넘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바로 그날 칠레는 대부분의 주민이 칠레인인 볼리비아의 안토파가스타에 군함을 접안시키고 500여 명의 군인을 내려놓았다. 칠레가 기습적으로 볼리비아를 침공한 것이다. 안토파가스타에는 볼리비아인이 적었기 때문에 양국 간의 실질적인 전투는 3월 23일에 벌어졌다.
토파테르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500여 명의 칠레군은 135명의 볼리비아군을 완파했다.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싸움에서 페루는 양국을 중재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칠레는 볼리비아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페루를 친(親)볼리비아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볼리비아는 페루에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출병을 요구했으나 페루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미적거렸다. 그러다 칠레는 4월 5일 페루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3국은 모두 전쟁 대비가 부족했다.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 국가들이었으니 모두 병력이 적었다. 병력 수로는 페루가 5241명으로 제일 많았다. 볼리비아는 2175명, 칠레는 2694명이었다. 그러나 칠레군의 무기 성능이 월등했다. 칠레는 치밀한 준비를 했기에 페루에 선전포고를 할 때는 병력을 7906명으로 증강시켰다.
아타카마 사막에는 도로나 철도가 연결돼 있지 않았고 물도 귀해 전쟁은 주로 바다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볼리비아는 애초부터 해군이 없었다. 페루는 숫자로는 칠레와 비슷한 규모의 함정을 갖고 있었으나 페루 함정의 화력은 칠레 함정에 크게 뒤졌다. 칠레 해군은 페루 남부의 이키케 항구를 바로 봉쇄했다. 이에 5월 21일 페루 함대가 대응하면서 ‘이키케 해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으로 페루는 칠레 함대의 항구 봉쇄를 뚫었지만 주력함인 인데펜덴시아함을 잃는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이 해전에서 페루의 우아스카르함 함장인 그라우는 칠레 함정인 에스메랄다함을 격침시킨 후 부하들에게 적군 생존자를 모두 구해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사한 에스메랄다함 함장인 프라트의 부인에게 진심 어린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그라우는 이후의 해전에서도 인도주의적 태도를 보였기에 페루와 칠레 양국에서 ‘바다의 신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라우 함장의 활약 덕분에 페루는 6개월 동안 칠레 함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그러자 칠레는 함대의 지휘관을 월리암스 레보예도 제독에서 갈바리노 리베로스 제독으로 바꿨다.
사령관이 바뀐 칠레 함대는 10월 8일 안가모스 전투에서 우아스카르함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때 그라우 함장은 끝까지 전장을 지휘하다 전사했다. 이로써 제해권을 확보한 칠레는 전투를 지상으로 전환해 페루 남부의 타라파카와 아리카, 타크나 지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지도 2). 볼리비아 영토와 가장 인접한 페루 지역인 ‘타라파카’는 전쟁 전 칠레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자본이 진출해 이 지역에서 나오는 초석 생산의 50%를 장악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페루는 모든 칠레인을 추방하고 광산 장비를 몰수한 후, 페루와 볼리비아 동맹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타라파카 전투는 1879년 11월 2일 시작되었다. 칠레군은 먼저 타라파카 지역의 거점 도시인 이키케를 건너뛰어 그 북쪽에 있는 피사구아 해변부터 공격해 점령한 뒤 남쪽으로 이키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칠레군이 타라파카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타라파카 지역의 인구는 20만으로 페루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육박했다. 페루 수출량의 전부라고 할 정도인 2800만 파운드의 초석을 생산했다. 타라파카를 빼앗긴 것은 페루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 패배로 페루의 민심은 급격히 와해돼 수도 리마에서는 약탈 행위가 횡행했다. 페루 대통령 마리아노 프라도는 추가 군자금을 확보하고 무기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집무를 부통령에게 넘기고 유럽으로 간다고 발표했다. 국민은 이를 비겁한 도피 행동으로 간주했다. 유럽으로 간 프라도는 결국 페루에 돌아오지 않고 1901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칠레에 국보 약탈당한 페루
프라도의 출국 후 민중과 군부의 불만은 고조돼 12월 23일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볼리비아에서도 군부 반란이 일어나 나르시소 캄페로 장군이 새 대통령이 되었다. 타라파카 전투에서 승리한 칠레군은 북진을 계속해 아리카와 타크나 지역을 공격해 승리하고, 3월 21일에는 난공불락의 로스 앙헬레스도 점령했다. 이것이 분수령이 되어 1880년 6월 페루와 볼리비아의 정규군은 완전 와해됐다. 살아남은 볼리비아군은 안데스 산맥을 넘어 달아났다. 볼리비아는 전쟁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사태는 미국이 적극 개입해 중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미국은 1880년 10월 22일 아리카에 정박한 미국 함정 래카나와함에 칠레, 페루, 볼리비아의 대표를 불러 5일간 정전(停戰)회담을 갖게 했다. 칠레는 정전 조건으로 볼리비아의 아타카마 지역과 페루의 타카파나 지역을 양도하고, 2000만 페소의 금화를 전쟁배상금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페루가 칠레인으로부터 약탈해간 재산을 돌려주고, 페루와 볼리비아가 맺은 비밀동맹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칠레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리카와 타크나 등을 계속 점령하겠다고 주장했다.
페루와 볼리비아는 이 요구를 수용할 테니 먼저 칠레가 점령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칠레는 두 나라가 먼저 칠레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직후 칠레는 페루 수도인 리마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회담 전부터 칠레의 강경론자들은 적이 항거하지 못하도록 무조건 항복을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해왔었다.
다급해진 페루는 리마 근처에 비정규군 약 1만 명을 포진시키며 방어했지만 칠레군을 막지 못했다. 1881년 1월 17일 칠레군은 리마에 입성하고, 페루의 지도자 피에롤라는 간신히 리마를 탈출했다. 리마를 점령한 칠레군은 페루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장서들을 칠레의 산티아고로 옮기는 등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페루에서는 소수의 사람만 안데스 산맥에 은거해 칠레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1881년 칠레는 도밍고 산타 마리아를 새 대통령으로 뽑았다. 새로운 정부는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수도를 뺏긴 페루는 피에롤라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미구엘 이그레시아스 주도 아래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페루라는 국가가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882년 정전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페루 내의 무장 저항군은 정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칠레군은 이들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그리하여 1883년 10월 20일 칠레와 페루는 공식적인 종전 협정을 타결지었다. 이른바 안콘조약이다. 저항군의 마지막 지도자인 몬테로는 볼리비아로 망명했고 1883년 10월 29일 칠레군은 완전히 리마에서 철수했다.
이 전쟁으로 칠레는 자원이 풍부한 페루 남부 지역과 볼리비아 해안 지역을 확보해 엄청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 덕분에 1902년의 칠레의 재정은 1879년에 배해 900% 늘어났다. 이 전쟁으로 바다로 통하는 길을 뺏기고 내륙국가가 된 볼리비아는 지금도 매년 한 차례씩 ‘바다의 날(Dia del Mar)’을 기념하며 실지(失地) 회복에 대한 염원을 달래고 있다.
이 전쟁에서 3국 가운데 페루가 가장 큰 손실을 보았다. 영토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국민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잉카제국의 적손(嫡孫)을 자처하며 지역 맹주 위상을 확보하려 한 노력이 칠레군의 수도 입성으로 유린됐으니 그 내상(內傷)을 견디기 어려웠다. 2007년 칠레는 리마를 점령했을 때 약탈한 국보급 장서 4000여 권을 돌려주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으나, 하루아침에 씻을 수 있는 앙금이 아니었다.
피스코 싸움에서도 先攻한 칠레
전쟁 이후 페루와 칠레는 양국 간의 모든 현안에 대해서 사사건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페루 지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칠레에 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양국은 한 술의 원산지를 놓고 총만 들지 않은 전쟁에 들어갔다. 남미의 브랜디라 할 만한 ‘피스코(Pisco)’를 둘러싼 논쟁이다. 상표권을 둘러싼 이 싸움은 ‘피스코 전쟁(Pisco War)’으로 불리고 있다.
피스코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인 브랜디의 일종이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은 고향의 브랜디 맛을 느끼기 위해 현지에서 키운 포도를 고향에서 익힌 증류기술로 증류해 브랜디를 만들었다. 그 무렵 남미에서 재배된 포도가 스페인으로 수출돼 값싸게 팔려나가자, 스페인의 포도 재배업자들은 왕에게 남미산 포도의 수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라고 탄원해 관철시켰다. 그로 인해 남미에서는 포도가 남아돌아 술 제조가 활발해졌다.
피스코란 이름은 고대 잉카어로 작은 새를 뜻하는 ‘pisqu’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페루에는 이 이름을 딴 항구도시에서 술이 수출되기도 했고, 여기서 생산되던 술 담그는 토기도 피스코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칠레가 자국에서 만드는 술에만 피스코란 이름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칠레는 피스코가 만들어진 지역은 지금의 페루 남부와 칠레 북부에 연해 있는 지역이니, 칠레에 당연히 이 명칭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페루에서는 그들의 국민주(酒)인 피스코를 칠레가 욕심내는 것으로 보고 전국민이 분연히 일어섰다. 국민 감정을 의식한 페루의 정치 지도자들은 초강경으로 맞섰다. 그들은 칠레는 태평양전쟁으로 빼앗은 페루 남부 지역에서 피스코를 생산해 미국에 수출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이름을 얻게 된 것뿐 피스코의 원조는 페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피스코의 원산지가 페루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역사적 문헌을 제시했다.
칠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칠레는 스페인 정복 시절 페루 남부뿐만 아니라 지금의 칠레 북부에서도 피스코가 만들어졌던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며 페루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그리고 칠레의 연간 피스코 생산량은 5000만L로, 150만L인 페루보다 월등히 많고 국내 소비량도 페루의 20배나 된다고 강조했다.
이 싸움을 지켜본 이들 가운데 일부는 페루와 칠레의 피스코는 근본은 같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약간 다른 술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페루의 피스코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포도를 사용해 만든다. 비방향성(非芳香性·nonaromatic) 포도 종류인 ‘퀘브란타’ ‘코먼 블랙’ ‘도야르’ ‘우비나’와, 방향성(aromatic) 포도 종류인 ‘이탈리아’ ‘무스카트’ ‘알비야’ ‘토론텔’ 등 8가지 품종을 이용한다.
페루 피스코에는 크게 네 종류가 있다. 첫 번째가 퓨어(Pure) 타입인데, 이는 반드시 한 종류의 포도로 만든다. 주로 퀘브란타(Quebranta) 종을 사용한다. 모야르(Mollar)나 코먼 블랙(common black)을 사용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방향형을 한 품종만 사용하는 것이다. 무스카트(Muscat)가 주로 사용되고 알비야(Albilla)나 이탈리아(Italia), 토론텔(Torontel) 종이 사용되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모스토 베르데(Mosto Verde)가 있다. 영어로는 ‘green must’이니 완전히 숙성시키지 않은 포도즙이다. 포도즙의 당분이 알코올로 완전 발효되지 않은 상태에서 증류시켰기에 특징적인 맛을 갖고 있다. 마지막이 아코라도(acholado) 형태다. 이는 두 가지 이상의 포도 품종을 섞어 만든 피스코다.
법적으로 피스코는 유리나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에 넣어 3개월 이상 저장해야 한다. 다른 용기에 저장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용기가 술의 물리적, 화학적, 기질적 성상을 변화시키지 않아야 한다. 이 때문에 피스코는 숙성 제품임에도 위스키나 코냑 등에서 맡을 수 있는 나무향이나 색깔이 없다. 병에 넣기 전에 술의 특성과 알코올 농도를 변화시키는 첨가제 사용도 일절 금지한다. 피스코는 증류주이므로 38~48도 사이의 비교적 높은 알코올 농도를 지닌다.
칠레와 타협 거부한 페루
칠레 피스코는 페루 피스코와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페루 피스코는 갓 만든 와인을 재료로 사용하나, 칠레 피스코는 완전 발효된 숙성 와인을 재료로 사용한다. 사용하는 포도 종류도 세 품종으로 국한되며, 필요하면 오크통에서 숙성해도 된다.
최대 주류 시장인 미국에서 피스코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85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한 바텐더에 의해 일어났다. 던컨 니콜이라는 바텐더가 ‘피스코 펀치(Pisco Punch)’라는 칵테일을 개발해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이다. 피스코 펀치는 금문교의 일몰만큼이나 중요한 샌프란시스코의 관광 명물이 되었다.
그러나 던컨 니콜이 레시피를 비밀로 한 채 사망하자 피스코 펀치에 대한 인기도 가라앉았다. 때마침 시행된 미국의 금주법으로 피스코 소비는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 세계적으로 다양한 술에 대한 소비가 일어나면서 피스코가 되살아났다. 피스코에 대한 칠레와 페루의 감정싸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6년 세계 지적소유권위원회가 피스코에 대해 칠레 측의 권리 주장에도 타당성이 있다고 결정하자, 칠레 정부는 즉각 페루에 두 나라 정부가 공동으로 피스코 판촉 활동에 나서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페루는 단호히 거절하며 피스코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했다. 현재 양국은 상대국의 피스코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피스코에 대한 페루의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은 2008년 11월 23일 국내 언론에 보도된 다음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피스코 칵테일, APEC 회의장서 인기
페루 리마에서 22일 개막한 제16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초점은 금융위기 해법에만 쏠려 있는 게 아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21개국 정상들의 눈과 혀를 사로잡은 ‘숨은 주인공’도 있으니, 바로 페루의 국가 대표 포도주인 ‘피스코’로 만든 칵테일이다.피스코 칵테일은 APEC 회의 개막 전인 지난 19일 열린 페루-중국 정상회담에 등장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알란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양국 간 FTA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발표하자 웨이터들이 피스코 칵테일을 축하주로 내온 것이다.이후 피스코는 APEC 개막을 전후해 열린 각국 정상들 간 회담에 수시로 등장하며 이번 회의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40세가 되던 해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마저 개막식 날 피스코 칵테일을 마셨을 정도다.한국의 이명박 대통령 역시 APEC 개막일인 22일 “한국인들도 피스코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술을 즐겨 마시며, 탱고나 삼바, 살사 같은 남미 전통 춤 역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인기”라고 발언하며 피스코 칵테일과 페루에 대한 친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피스코는 16세기 페루에 정착한 스페인 이민자들에 의해 개발된 술이다. 페루에 도착한 스페인 이민자들은 스페인산 브랜디의 일종인 ‘오루호(orujo)’를 대체하기 위해 이 술을 개발한 뒤 자신들의 새 정착지인 페루 항구도시 피스코의 이름을 따 ‘피스코’라 불렀다. 이번에 인기를 끈 피스코 칵테일은 피스코에 레몬 주스, 달걀 흰자, 시럽을 첨가해 만든 술로,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이를 손님 접대용 혹은 파티용 술로 애용한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피스코 칵테일은 바로 ‘피스코 사워(pisco sour)’로, 20세기초 리마에 근거를 둔 미국인 바텐더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루 피스코는 나무통 숙성 과정이 없기에 보드카처럼 칵테일의 기본 술로 즐기는 경우가 많다.
페루와 칠레 사이의 피스코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전쟁에서 패배해 영토까지 빼앗긴 페루는 칠레에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2. 11월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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