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술술

[아침논단] 묘약을 독약으로 만드는 酒暴 (조선일보)

해군52 2012. 8. 2. 13:38

[아침논단] 묘약을 독약으로 만드는 酒暴 (문정희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인간의 희로애락 곁에 놓인 친근하고 향기로운 벗, 술

의존·남용하면 독으로 변해… 남의 돈으로 2차·3차 마시고

작당과 야합의 술자리는 그만… 이제 술의 멋과 格을 높이자

 

술을 사랑하지 않은 시인은 드물다. 시인뿐 아니라 많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 술에 빚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술이 주는 일탈과 해방, 위반의 쾌감, 상식에 대한 반항과 자유, 위로와 상상력은 누구에게나 뿌리치기 어려운 매력이다. 자신의 천재에다 술의 탐미와 광기를 합하여 섬광 같은 작품을 낳은 시인도 떠오른다. 좀 과장해 보자면 술잔은 우주의 기운을 나르는 작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배(聖杯)에서부터 축배, 노동 후 땀과 함께 기울이는 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그 숨결을 함께 해왔다.

 

물론 한국문학도 술 냄새가 짙기는 마찬가지이다. 술병을 들고 강으로 뛰어드는 남편을 보고 통곡하는 아내의 노래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고조선 시가(詩歌)의 첫 장에 기록되어 있질 않은가. 조선시대 시인 매창(梅窓)은 취한 임이 비단적삼을 찢어놓자, 그까짓 적삼이 아까운 게 아니라 고운 정이 찢어질까 두려워하는, 요즘으로 치면 주폭(酒暴)에 가까운 행태를 나무라는 시를 남겼다. 근대에 들어서도 청록파 시인들이 묘사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놀은 한국인의 가슴을 유유히 흐르는 취기의 가락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사회문제로 떠오른 주폭의 문제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거칠게 변천되어 오는 사이에 생겨난 술의 폐해로 그냥 묵인하고 관용해준 결과인 것이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문제로 제기하고 그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술은 인간의 희로애락 곁에 놓인 가장 친근한 위안이요 향기로운 벗이지만 술에 상습적으로 의존한다거나 과다하게 남용하면 그것은 곧 생명과 질서 파괴와 직결되는 무서운 독(毒)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술에 관한 멋과 격(格)도 생각해보고 그 문화도 한껏 올려보아야 할 것이다. 술을 손쉬운 모임이나 접대나 향락의 차원에서 대하는 것은 문화 이전의 문제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런던올림픽의 개막식을 연출한 대니 보일 예술총감독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 문호(文豪) 셰익스피어와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둘 다 술에 대해 큰 혐오를 보낸 시인들인데, 두 시인을 통해 영국 사회를 조금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롭다. 셰익스피어는 술을 향해 "술의 정(精)이여, 만약 너에게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너를 악마라 부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술에 만취한 국왕 직속 기병대의 멱살을 잡았다가 왕과 국가를 위해(危害)하고 선동한 죄목으로 자칫 교수형까지 받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그 후 그는 악(惡)의 무리를 비판하는 빼어나게 암시적이고 개성적인 작품을 남겼다. 영국 사회가 오늘날 신사도를 내세우기까지 얼마나 숱한 술의 폐해와 격랑을 거쳤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대의 알코올 소비국이다. 한국이 수입한 고급 위스키의 양이 세계 4위라는 통계도 있다. 청소년 음주율도 나날이 높아가는 추세이다. 이 기록들은 자살률·실업률의 기록과 함께 지금 한국 사회가 몹시 거칠고 고달프고 힘든 사회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하지만 사람들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원인 분석과 핑계를 대기에 앞서 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술김에 부리는 만취 폭력의 행태는 범죄이고, 알코올 중독은 병이라는 진단을 분명하게 내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술이 소비되는 사회구조와 그 방식에 대해 면밀한 검토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술 마시는 행위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계를 명확하게 밝혀두어야 하는 것이다.

 

폭탄주와 2차·3차로 이어지는 술, 판공비·접대비로 마시는 음주는 사회적 낭비이다. 작당(作黨)과 야합(野合)의 수단이 되는 술자리도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대화와 여유가 넘치고 격이 함께하는 술의 차원을 우리 사회가 진심에서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술은 인간의 슬픔과 기쁨 곁에 앞으로도 오래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술을 대하고 즐기는 태도가 그 사회의 문화이다.

 

묘약(妙藥)이자 독약(毒藥)인 술을 나르는 잔은 아주 작다. 그러나 그 잔 속에 예술도, 인격도, 폭력도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