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도자와 술 (17)
존 F 케네디의 ‘작업주’ 다이키리
다이키리는 럼과 라임주스에 설탕을 탄 비교적 간단한 레시피의 칵테일이다. 쿠바 광산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이 칵테일은 공교롭게도 재임 기간 내내 쿠바와 불편한 관계였던 존 F 케네디가 즐겨 마신 술로 유명하다. 케네디를 위해 영부인 재클린이 만든 ‘재키 다이키리(Jackie Daiquiri)’는 지금도 인기 칵테일이다. 최근에는 케네디 재임 시절 백악관 인턴을 한 미미 알포드란 여성이 케네디와 성관계를 맺기 전 마신 ‘작업주’로 알려지면서 다이키리가 다시금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지난 5월 17일 국내 신문은 ‘멈추지 않은 케네디家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정치명문가인 케네디 집안 소식을 실
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며느리인 메리 리처드슨 케네디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보도였다.
“올해 52세인 메리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며느리다.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로 환경 전문 변호사로 유명한 로버트 케네디 2세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는 그동안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를 받아왔다. 그의 사인은 공식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자살로 추정된다. 로버트 케네디 2세와 1994년 결혼한 메리는 그와의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뒀으나 2010년 이혼소송과 함께 별거에 들어갔으며 이 무렵 2차례나 음주운전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메리의 사망은 케네디 전 대통령의 막냇동생으로 한때 대권 도전을 꿈꿨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2009년 8월 뇌종양으로 사망한 지 3년 만에 발생한 케네디가의 또 다른 비극이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한때 미국 정계를 화려하게 수놓은 케네디 가문의 역사는 찬란한 영광과 함께 가족의 비극적 죽음과 스캔들로 점철됐다. 마치 잘 만들어진 대하드라마를 연상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생긴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표현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용어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찍이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으로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하고 영국대사까지 지낸 조지프 케네디(Joseph P Kennedy·1888∼1969)는 보스턴 시장을 지낸 존 피츠제럴드의 딸 로즈와 결혼해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 조지프 주니어는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영국 근해에 추락해 전사하면서 가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리고 1963년에 ‘케네디가의 저주’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9남매의 둘째이자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총격에 쓰러진 것이다. 그의 아내 재클린은 훗날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1906~1975)와 전격적으로 결혼하면서 당시 세계 매스컴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그런 그도 1994년 암으로 사망했다.
케네디의 암살 사건 충격이 있은 지 5년 뒤 케네디 가문은 또 하나의 비극을 맞는다. 바로 일곱째인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1925~1968) 암살이다. 그는 케네디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내고, 뉴욕 주 상원의원을 거쳐 민주당 대선 경선에 뛰어들어 압도적인 지지 속에 백악관 입성을 목전에 뒀다. 그러나 196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유세 도중 괴한의 총격에 암살당한다. 범인은 팔레스타인 출신 이민자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으로, 케네디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형제가 연속적으로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이때부터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용어가 미국 정가(政家)에 등장하게 된다. 그 후에도 앞서의 사건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케네디 집안의 크고 작은 불운은 계속되었다.
집안 막내이자 또 한 명의 대통령 유력 후보였던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1932~2009)도 1960년 형 존의 뒤를 이어 20대의 나이에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정치경력을 펼쳐나갔다. 그는 1964년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1969년에 형 로버트의 선거운동원이던 여성을 태우고 밤에 빗길을 달리다가 강물에 추락했다. 동승했던 여성이 숨졌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에게 평생 멍에가 돼 결국 백악관 도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2009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셋째 로즈마리는 전두엽 수술 실패로 평생을 수용시설에서 지내다 2005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넷째 캐서린은 194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케네디가의 저주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이들의 후손인 케네디가 2세 중 몇몇은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리거나 비극적 운명을 맞은 경우가 적지 않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99년 아내 캐럴린 베셋을 태우고 자신이 직접 소형비행기를 조종하다 매사추세츠 마서즈 빈야드 인근에 추락해 3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도 직접 상황을 보고받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것이 케네디가의 마지막 비극이 되길 바란다”며 케네디 주니어를 위해 기도했다. 교황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장례식 당시 3세이던 케네디 주니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회상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넷째 데이비드는 1984년 플로리다의 한 호텔에서 약물과다 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으며, 여섯째인 마이클은 1997년 콜로라도에서 스키 사고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장남 에드워드 2세는 어린 시절 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는 불운을 겪었다. 1세대 형제자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진 케네디 스미스의 둘째 아들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는 1991년 플로리다의 한 클럽에서 만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섯째인 유니스의 딸 마리아 슈라이버는 유명한 보디빌더 출신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혼외정사 스캔들로 이혼소송 중이다.
이처럼 케네디가의 저주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사실 그 저주의 정점은 뭐니 해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1917~1963)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앞서 기사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그의 부계, 모계 양가는 모두 명문 집안이었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고, 반항적인 행동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1936년 하버드대에 입학해 국제정치 수업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고, 가문의 후광을 바탕으로 수차의 유럽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 그의 학위 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는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40년 하버드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케네디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케네디의 젊은 시절 경력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역시 군대와 관련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에 케네디는 육군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만성적인 허리 병(요통)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그해 9월 과거 그의 부친이 대사 시절 해군 무관을 지낸 사람에게 부탁해 마침내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1943년 8월 소형 어뢰정(PT-109)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중 솔로몬 군도 근처에서 일본 구축함 공격을 받아 배가 격침당하는 위기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케네디는 자신이 부상을 당했지만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선원들의 생명을 건지는 활약을 보였고, 이 전공으로 해군 훈장을 받는다. 이후에도 여러 전투에 참여해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케네디는 1945년 초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명실 공히 전쟁영웅의 신분으로 해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의 형이자 가문의 장남인 조지프(Joseph P Kennedy, Jr·1915~1944)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중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하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집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형이 죽자 그 책임과 짐은 둘째인 존 F 케네디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제대한 뒤 부친의 주선으로 잠시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며 포츠담 회담 등을 취재하던 케네디는 1946년 3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매사추세츠 주 제11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후 6년간 하원의원을 지낸 케네디는 1952년에는 같은 지역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3년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였던 재클린(Jacqueline Kennedy onassis·1929~1994)과 결혼한다.
44세에 35대 미국 대통령 당선
1956년 그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에서 후보로 선출된 스티븐슨(Adlai Stevenson II· 1900~1965)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경합했지만 그 자리는 에스테스 케포버(Estes Kefauver·1903~1963) 상원의원에게 돌아가고 만다. 그의 부친은 당시 공화당 후보이자 현역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1890~1969)의 막강한 경쟁력으로 민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차라리 아들 케네디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해 선거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재선에 성공한다.
어쨌든 1958년 재선 상원의원이 된 케네디는 1960년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그는 정략적으로 남부 출신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1908~1973)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정한 뒤, 이른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선거에 뛰어들었다.
당시 선거는 미국 정치사상 처음 TV를 통한 후보 간 토론이 시행된,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거전이었다. 메이크업을 하고 나선 젊은 케네디는 준수한 용모와 능란한 언변, 그리고 여유 있고 호소력 있는 분위기로 상대 후보 닉슨(Richard Nixon·1913~1994)을 압도했다.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44세의 나이로 3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선거를 통해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최연소 대통령은 부통령에서 대통령을 승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마침내 1961년 1월 20일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F 케네디는 취임사에서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묻기 전에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먼저 물어보십시오(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라는 명연설을 한다.
그런 그도 결국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영부인 재클린과 무개차를 타고 자동차 퍼레이드를 하던 중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암살 용의자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왈드는 범행을 부인했고, 사건 이틀 뒤 댈러스 경찰서 뒷마당에서 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이후 수많은 추측과 음모론이 난무하면서 지금도 호사가들의 관심 대상이다.
케네디는 술을 즐기는 편이었으나 비교적 절제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던 술 종류는 주로 다이키리(Daiquiri), 블러디 메리(Bloody Mary) 같은 칵테일 종류였는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녁에 한 잔 이상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가 특히 좋아한 다이키리는 오늘날에도 ‘케네디의 술’로 꼽히고 있다.
럼과 라임과 설탕의 조합, 다이키리
다이키리는 럼과 라임(또는 레몬) 주스에 설탕을 탄 비교적 간단한 레시피의 칵테일이다. 공교롭게도 다이키리는 케네디 재임 기간 내내 불편한 관계였던 쿠바에서 탄생한 술이다. 20세기 초 독립했지만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각종 기술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쿠바 남쪽 다이키리 광산에도 미국 기술원조단이 들어갔다. 이들 엔지니어들에게 더운 지방에서 하는 작업이 쉬울 리 없었다. 따라서 쿠바 광산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럼, 라임주스, 그리고 설탕으로 만든 칵테일이 개발되었다.
이 칵테일은 산뜻한 청량감에 피로회복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미국 기술진의 총감독이었던 제닝스 콕스가 이 칵테일에 광산 이름인 ‘다이키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다이키리는 럼의 특성을 살리는 매력적인 맛으로 명성을 얻게 됐고, 1920년대부터는 쿠바 수도 아바나(Havana)를 중심으로 급속히 인기를 끌었다.
다이키리에는 여러 변형이 있는데, 그중 기존의 다이키리 레시피에 얼음을 넣어 같이 갈아서 내놓는 ‘프로즌 다이키리(Frozen Daiquiri)’가 오리지널 다이키리와 함께 칵테일 애호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부인 재클린도 다이키리를 매우 좋아해 남편과 종종 이 칵테일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재클린은 레시피를 적은 메모를 백악관 부엌 벽에 붙여 백악관 요리사들과 청소 도우미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재키 다이키리(Jackie Daiquiri)’로 알려진 그의 다이키리 레시피는 럼과 찬 라임수(limeade), 신선한 라임주스를 2대 2대 1로 혼합한 뒤 약간의 인공감미료를 첨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다이키리가 올해 들어 다시 매스컴의 관심을 끌었다. 백악관에서 인턴 근무를 한 여성이 케네디의 사생활을 폭로하면서 다이키리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뉴욕시 교회 행정처 일을 끝으로 은퇴한 69세의 미미 알포드(Mimi Alford)라는 한 미국 여성은 최근 ‘그 옛날의 비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과 그 후유증(Once Upon a Secret: My Affair with President John F. Kennedy and Its Aftermath)’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존 F 케네디의 치부가 드러났다.
사실 존 F 케네디의 생전 여성 편력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미미 알포드의 이번 고백은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인 데다 ‘케네디의 사생활이 이런 정도까지였나’ 하는 대목도 나온다. 내용 일부를 들여다보자.
때는 196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명문인 휘튼대 1학년을 마친 미미 알포드는 큰 키에 매력적인 몸매의 금발 미인이었다. 그는 백악관 홍보실에서 인턴으로 채용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런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젊은 대학생들이 기회만 되면 서로 앞 다투어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는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백악관으로부터 먼저 제안이 왔다. 그의 채용에 어떤 정치적 배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와 케네디의 인연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고교 졸업반 시절 학교신문 편집 일을 보고 있던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매력적인 케네디와 재클린 커플에 크게 매료됐다. 더구나 재클린은 고교 선배였고, 재클린에게 학교신문 인터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케네디의 情婦 미미 알포드
헤밍웨이가 다이키리를 마시려 즐겨 찾았던 하바나의 바는 관광명소가 됐다.
재클린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되었지만 대신 영부인의 대외 업무 비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 비서는 인터뷰 대신 그날 예정된 백악관 행사인 대통령과 소년소녀들과의 만남 자리에 참석할 것을 권했고, 결국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는 백악관 인턴이 되는 행운을 잡았다. 백악관 인턴 근무 4일째 되던 날,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인 데이브 파워즈(Dave Powers·1912~1998)로부터 백악관 풀장에서 매일 있는 한낮 수영모임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미미 알포드는 ‘여러 인턴 중 왜 하필 나일까’하고 잠시 의아했지만 대통령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수영장에서 만난 케네디는 그가 맡고 있는 일에 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수영장을 나갔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머리카락이 채 마르기도 전에 파워즈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과의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오후 5시 30분 파워즈를 만나 백악관 2층으로 향했다. 2층은 대통령과 가족이 거주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그가 도착한 곳은 웨스트 시팅 홀(West Sitting Hall)이라는 방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이키리가 등장한다. 대통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파워즈가 그녀에게 미리 준비되어 있던 다이키리 한 잔을 권했다. 그러고는 백악관 인턴이 된 것을 환영한다며 분위기를 맞춘 파워즈는 케네디가 오기 전 그와 함께 있으면서 여러 차례 잔을 채워줬다고 한다. 재클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버지니아로 휴가를 떠난 상황이었다. 이윽고 방으로 들어선 케네디는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미미 알포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던 순간 다이키리 술기운이 머리로 강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가족 식당을 보여준 케네디는 재클린의 방을 보여줬고, 케네디는 그 방에서 19세의 인턴과 성관계를 맺었다. 실제 책에는 자세히 묘사돼 있지만 여기선 이 정도로 정리하자. 이후 미미 알포드는 케네디가 마련해준 리무진을 타고 귀가하게 된다. 그는 케네디가 암살당하기 전까지 18개월가량 대통령의 정부가 된다. 그런데 미미 알포드의 고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수영장에서 자신의 옆에 있던 파워즈에게 오럴 섹스를 시킨 뒤 이를 지켜보는 관음증 환자와 같은 행동을 보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63년에는 상원의원에 처음 당선된 그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에게 오럴 섹스를 하라고 요청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고 밝히고 있다. 어쨌든 다이키리는 케네디의 ‘작업주’였던 셈이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다이키리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드높인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바로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문호 헤밍웨이(1899~1961)다. 미국인이던 헤밍웨이가 쿠바를 미치도록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는 1939년부터 20여 년간 쿠바에서 살면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 20세기 문학사를 대표하는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 아바나에서 그는 특유의 수염에 늘 쿠바산(産) 시가를 입에 물고 단골인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 바에 나타났다. 바텐더는 헤밍웨이만 나타나면 그가 사랑하는 칵테일 다이키리를 만들어 큰 잔에 담아주었다. 그 후 이 바는 헤밍웨이의 유명세에 따라 덩달아 유명해져 오늘날까지 아바나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바 건물의 바깥쪽에는 ‘다이키리 원조집(cuna del Daiquiri)’이라는 흥미 있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 오늘날 다이키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존 F 케네디와 헤밍웨이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신동아 2012. 8월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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