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서 본 세계바텐더대회, 게스트에게 엄격한 복장 요구…
격식 갖추니 스스로 음주량 자제, 기나긴 코파카바나 해변 어디서도
술 취해 휘청대는 사람들 안 보여, 구토와 고함 뒤덮인 서울 떠올라
문갑식 선임기자 코파카바나 해변은 황량했다. 이빠네마 해변과 함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이 휴양지에도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음울한 하늘이 강풍을 빚어내자 파도가 포효했다. 가끔 내리는 비는 뼛속 깊이 한기(寒氣)를 전했다.
대척점(對蹠點). 한국에서 지구 핵(核)을 직선으로 연결할 때 나오는 반대편을 우리는 이렇게 표현한다.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길은 멀었다. 인천공항에서 두바이까지 9시간 반, 거기서 다시 4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15시간을 날아야 리우다.
내게 리우는 '꿈의 도시'였다. 프랑스 영화배우 장 폴 벨몽드가 주연한 '리오의 사나이'를 접한 게 TV '주말의 명화'를 통해서였다. 이 재탕(再湯) 전문 방송 덕에 명절마다 의무처럼 영화를 봤다. 그 후 코르코바두 언덕의 예수상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처럼 됐다.
가슴 한쪽에 화석처럼 남아있던 예전 기억이 40년 만에 현실이 됐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어떤 실마리가 그런 결과를 낳았을까, 되짚어보니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酒暴) 때문이었다. 과연 인연은 질기다. 몇 방울 알코올의 마성(魔性)은 지성들의 수천년 고민거리가 돼왔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근로는 나날을 풍요하게 만들고 술은 일요일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반면 미국의 법률학자 겸 문학자 잉거솔은 '술은 범죄의 아비요 더러운 것들의 어미'라고 질타했다.
한 선배가 "한국바텐더대회의 심사위원을 해 보라"는 제의를 해온 건 주폭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노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공짜술 마실 기회'라고 덥석 수락했는데 그게 한 바텐더와의 만남과 브라질 세계바텐더대회 취재로 이어졌다. '널빤지'를 뜻하는 바(Bar)와 '돌보다'는 텐더(tender)의 합성어인 바텐더는 16세기 영국에서 등장했다. 양조(釀造)업과 판매업이 분화되면서 생긴 신종 직업인데 한마디로 '품격있는 음주를 돕는 역할을 하는 이'로 보면 된다.
그런 바텐더가 한국에선 '불쇼'나 벌이는 사람쯤으로 취급된다. 알아보니 톰 크루즈의 영화 '칵테일' 탓이 크다고 한다. 바텐더는 고객과 교감하며 올바른 음주를 돕는 일인데 엉뚱한 영화 한 편이 직업을 왜곡시켰다.
서성태(39)는 한국 바텐더업계에서 고참에 속한다. 60~70세가 넘는 백발 성성한 바텐더가 즐비한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한국에선 40세만 넘어도 '원로' 축에 속한다니 대학 졸업 후 12년 동안 바텐더 외길만 파온 그는 이색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서울 마포 달동네에서 보낸 소년기를 서성태는 '외로움'이라는 한마디로 기억했다. 그와 그의 누이는 어두컴컴한 집에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전거포 하던 아버지와 식당일 하는 어머니가 돌아올 때만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졸업 후 경주대 호텔경영학과에 진학했을 때 그는 정해진 운명처럼 조리기능사와 주조(酒造)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바텐더의 길에 들어섰다. 외롭게 자란 사람이 남을 돌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는 J W 메리어트호텔에서 12년간 청소하고 술을 옮기는 등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마침내 '캡틴'의 자리까지 올랐다. 오후 1시 작업을 시작해 6시부터 영업하고 새벽 2~3시까지 손님을 받은 뒤 퇴근하는 일과의 연속이었다. 그 세월 그는 유명 연예인부터 성공한 사업가, 철부지 재벌 2세의 술 마시는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그러면서 나름의 주도(酒道)를 터득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경어(敬語) 쓰기, 술은 분위기로 마시기, 일정량 이상 마셨을 때는 반드시 자제하기 등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술은 제값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돈 드는 것만큼 폭음(暴飮)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서성태가 위스키 '조니워커', 테킬라 '돈 훌리오'를 세계에 판매하는 디아지오 주최 한국바텐더대회에서 우승해 50여개국의 대표 바텐더들과 기량을 겨루는 장면을 코파카바나 해변의 한 유서깊은 호텔에서 목격하게 됐다. 그리고 매일 밤 이어지는 파티에 갔다가 놀랐다. 주최 측이 게스트들에게 엄격한 복장을 요구한 것이다. 남녀가 모두 성장(盛裝)해야 하는데 격식이 요구되니 음주량을 스스로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나흘간의 바텐더 경연을 보며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술도 마시기에 따라 예술처럼 될 수 있구나'라는 확신이었다. 그 느낌이 그토록 보고 팠던 코르코바두 예수상이나 야경(夜景)이 일품인 슈거로프(Sugar loaf) 산(山)보다도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치안이 좋지 않다는 리우의 기나긴 해변에서도 나쁜 기억이 별로 없다. 유괴·납치·강도 사건이 빈번하다고 해서 내심 긴장했는데 부랑자 몇 명이 구걸하는 정도였지 술에 취해 널브러졌거나 휘청대는 이를 본 적이 없다. 밤거리가 안전하다면서도 취객(醉客)의 고함소리와 구토와 싸움질로 뒤덮인 한국과 비교해보니, 과연 어디가 더 편안하고 살기 좋은 나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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