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48/문화일보)

해군52 2013. 3. 13. 18:46

가수선발시험 보러 왔던 16세 어린 소녀… ‘짝사랑’ 고복수 만나 ‘알뜰한 당신’ 됐죠

(48) 고복수-황금심의 ‘짝사랑’과 ‘알뜰한 당신’

 

연분이란 하늘만 아는 것이다. 대가수 고복수와 황금심 부부의 만남도 참으로 묘했다. 황금심은 말한다. “1934년, 늦가을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 나이 열넷이었지요. 언니와 함께 부민관(지금의 시민회관 별관)에 구경갔더랬는데, 거기서 고복수 선생을 처음 뵈었습니다. OK레코드사가 주관한 OK조선악극단의 공연 무대였지요. 고 선생은 온통 큰 것 투성이었습니다.”

 

“큰 키와 선량해뵈기만 한 큰 눈…. 그 양반이 ‘짝사랑’을 부를 땐 나는 찡한 감동에 젖었습니다. 새까만 무대복에 새빨간 꽃을 달고 허공을 바라보며 허우적대며 호소하듯 부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황금동(황금심의 본명)이 고복수를 만나게 된 것은 그보다 2년 후였다. 금동이 열여섯되던 이른 봄날. 남대문의 OK레코드사의 사무실에서 두 사람의 길고 오랜 인연은 시작된다. 금동이 조선일보에 난 신인 가수 모집광고를 보고 이 사무실에 들른 것이다.

 

“제가 가수 선발시험을 보러 간다니까 모두들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고들 하더군요. 심사위원석엔 회사사장 이철 씨, 문예부장이자 작사가인 김능인 씨, 그리고 가수로는 고복수 선생이 앉아 계셨지요.”

 

금동은 고복수를 보는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한다. 간신히 가슴을 가라 앉히고 ‘노들강변’과 ‘관서 천리’를 불렀는데 어떻게 불렀는지 당시에도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금동은 가요를 하나 더 부르라는 요청에 엉겁결에 그만 고복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짝사랑’을 부르고 말았다. 이때 금동은 고복수의 불길 같은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금동을 이화자 이후 최대 민요풍의 가수라는 찬사를 했다.

 

192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난 금동은 1937년 마침내 박시춘 작곡 ‘왜 못오시나요’, 손목인 작곡 ‘지는 석양 어이하리요’로 OK레코드를 통해 가요계에 데뷔한다. 하지만 작사가 이부풍에 의해 금동은 이내 빅터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게 된다. 빅터레코드사는 OK레코드사보다 당시 규모나 재정면에서 컸다. 빅터의 레코드판 한 장 값이 1원50전인 데 비해 다른 회사의 것은 1원에서 1원15전 사이였다.

 

금동은 3년 전속금 3000원에 매달 120원을 받는 조건으로 빅터에 전속된 것이다. 신인으로는 파격적이었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 울어서 당신 앞에 하소연할까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안타까운 가슴속에 감춘 사랑을/ 알아만 주신대도 원망 아니 하련만/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황금심과 부부의 연을 맺은 고복수는 당시 노총각이었다.인기와 돈을 한몸에 지니고 다녔지만 정작 사랑하는 여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고복수는 순진했고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 여성팬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걸려오는 여성의 전화와 밀려드는 여성의 편지를 대하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는 지방순회 공연 때면 전화가 있는 특실방만 골라서 들었다. 당시로는 전화가 있는 방이 꽤나 드물었다.

 

한번은 우수띤 음성의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주 공연 때였다. 인근 초등학교 앞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거기다 고복수에게 생면부지의 처지니 알아볼 수 있게끔 빨간 꽃을 꽂고 나오라는 주문이었다. 고복수는 바지에 칼날 같은 주름을 세우고 상의엔 커다란 빨간 꽃을 달고 초등학교 앞으로 총알같이 나갔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밤늦도록 그 여성을 기다렸지만 나와야 말이지. 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초등학교 앞으로 줄기차게 나갔지만 여인은 나타나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전화는 동료들의 장난질이었던 것이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아-단풍이 휘날리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후유 한숨 집니다.’

 

‘짝사랑’은 가장 숭고한 것. 그래서인지 작사가 박영호는 짝사랑의 처절한 외로움을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맞은 짝사랑’이라고 승화시켰다. 사랑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작사가 박영호는 ‘시에톤 레코드사’를 비롯해 ‘태평’ ‘오케이 레코드사’의 문예부장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작사를 했다. ‘처녀림’ ‘불사조’는 그의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