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49/문화일보)

해군52 2013. 3. 20. 18:48

가수 꿈꾸며 고향 떠나 ‘불효자’ 진방남… 재일동포 환영식서 어머니 생각에 ‘울컥’

(49) 이재호-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1978년 2월 어느 날.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른 가수 진방남(본명 박창오)은 작곡가 박시춘과 함께 서울 인현동 단골 술집에서 한잔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방남은 출입구 쪽 탁자에 놓여 있는 TV에 연신 눈길을 주고 있었다. 화면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귀성단 환영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리운 고향땅을 지척에 두고 어디서 무엇을 하시느라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저 반갑고 반가울 뿐입니다.”

 

“재일동포 여러분 고향을 그리워하신 세월이 과연 몇해나 되셨습니까? 산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온갖 수모와 고초를 받으시는 동안 여러분의 젊음은 영영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과거는 울어서 한강물에 띄워 버리고 오늘은 조국의 품에서 기뻐하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환영사에 마침내 2000여 명의 재일동포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정답고 그리운 조국을 지척에 두고 지금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타향살이를 했는지 후회가 뼈에 사무칩니다. 우리들은 불효자식인데도 조국은 우리들을 뜨겁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조국에 돌아와서야 조총련이 우리를 지금까지 속여 왔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우리조국 만세! 귀성단 권중석 대표의 답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어 여흥프로에서 김희갑이 등장해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오실 어머님을/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 해요, 다시 못올 어머니여/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못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양 바라시고/고생 하신 어머님이/어이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님.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이국에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뵈옵고 산소에 어푸러져/한없이 웁니다.’

 

코미디언 겸 가수 김희갑의 구성지고 슬프디 슬픈 노래를 듣던 진방남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진방남 노래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박시춘은 중계 도중 진방남이 감쪽같이 없어진 데 처음은 무심히 넘겼으나 너무 오래라서 슬며시 걱정이 됐다. 그러나 이미 짚이는 구석이 있어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방남은 화장실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작사가 반야월로서가 아니라 가수 진방남으로 돌아가서….

 

1936년 비가 청승맞게 질척거리던 어느 봄날. 스무살의 진방남은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우산도 없이 마산역으로 향했다. 그는 본디 소설가 지망생.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푸시시 한 머리를 흩날리며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진방남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울로 온 그는 양복점에 취직하여 가수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의 노래를 들어본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수가 되라고 들쑤셨다. 그는 험한 타향살이를 잘도 견디었다. 어머니만 떠올리면 금세 그는 힘이 솟았던 것이다.

 

1938년 봄.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한 노래 콩쿠르대회에서 그는 ‘춘몽’이라는 노래를 불러 일등을 했다. 그리하여 태평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돼 ‘불효자는 웁니다’의 노래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오사카(大阪) 스튜디오서는 ‘모친 별세’라는 전보가 도착해 있었다. 진방남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누르고 취입을 끝냈다 취입 스튜디오 밖에서는 고려성, 백년설, 선우일선, 신카나리아, 고운봉, 나성례 등 동료가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곡가 이재호는 이때 ‘불효자는 웁니다’를 녹음하기 위하여 달리는 차에서 편곡을 했다. 이재호는 ‘세세연년’ ‘북국 5천킬로’ ‘기타에 울음 실어’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남강의 추억’ ‘선유화’ ‘무정열차’ ‘불효자는 웁니다’ ‘만포선 길손’ 등 명가요를 남긴 사람.

 

작사가 김영일의 필명은 ‘불사조’. 일제강점기 때 그는 김두한과 더불어 종로에서 장사를 하는 우리 조선 상인들을 주먹으로 보호해 주기도 했다. ‘찔레꽃’ ‘황하 다방’ ‘쌍고동 우는 항구’ 등이 그의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