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47/문화일보)

해군52 2013. 3. 6. 18:45

난소암 대수술 앞둔 생사의 갈림길… 유서 쓰듯 짧은 인생 詩的으로 풀어

(47) 김희갑-양희은의 ‘하얀 목련’

 

1983년. 양희은이 부른 ‘하얀 목련’은 가수 자신의 생사(生死)의 길목에서 탄생한 생명의 노래이다. 그녀는 그때 지병인 난소암을 수술받기 위해 경희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머리맡에 성경과 찬송가를 두고 기도를 하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양희은은 하나님께 매달렸다. 모든 걸 그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를 하게 되면 그때까지 그를 짓눌러 오던 온갖 두려움과 번민이 사라졌다.

 

그런 어느 날. 기도를 마친 양희은의 눈길은 한곳을 응시하게 된다. 병원 창밖이었다. 거기엔 하얀 목련이 나른한 봄빛 속에서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을까만, 대수술을 앞둔, 그것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양희은 눈에 비친 하얀 목련은 눈물나게 아름다운 것이었다.

 

순간 양희은의 뇌리엔 그의 짧은 인생을 정리하는 시가 스쳤다. 그가 세상에 남기는 유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우리 따스한 기억들/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거리엔 다정한 연인들/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서정적인 노래시가 아닌가. 양희은은 아직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았던지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하얀 목련’은 김희갑의 작곡으로 이듬해 취입됐다. 노래는 물론 양희은이 불렀다.

 

하나님을 몸으로 느끼면서 양희은은 깊은 신앙에 빠지고 마침내 찬송가를 부른다. 그는 결혼해 미국 LA에서 살다가 귀국해 지금 맹활약을 하고 있다. 가수로서 방송 진행자로서.

 

경기여고를 다닐 때부터 양희은은 책보다는 기타를 대하는 시간이 많았다.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 이백천 이해성 등이 지도하던 ‘청개구리 모임’이 당시 YWCA에서 주말이면 열렸다.

 

양희은은 통기타를 들고 이 모임에 자주 얼굴을 디밀었다. 1970년 여고를 졸업한 그는 재수 끝에 서강대 사학과에 들어간다. 그러나 1972년, 휴학을 하고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위해 동아방송을 찾았다.

 

‘3시의 다이알’ ‘정오의 가요산책’ ‘영시의 다이알’ 등 인기 프로를 맡고 있던 이해성 신태성 김병우는 양희은을 위해 레코드 발매 기금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사보이 호텔 뒤에 있던 ‘OB’S 캐빈’에 양희은을 출연토록 주선해 주었다. ‘OB’S 캐빈’은 젊은 통기타 가수들의 집결처였다. 조영남 김세환 트윈폴리오의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이용복 등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희은은 드디어 김민기 작사 작곡의 ‘아침 이슬’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이후 그는 그 특유의 반향이 넓고 다이내믹하면서도 어딘가 애수가 서린 음성으로 젊은층의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세노야’ ‘한사람’ ‘내 꿈을 펼쳐라’ ‘들길 따라서’ ‘내 님의 사랑은’ ‘한계령’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숲’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그는 주옥같은 노래를 남기고 있다.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하얀 목련’의 작곡가 김희갑은 평양 태생으로 안과의사인 아버지로부터 만돌린이며 아코디언, 그리고 색소폰과 기타를 배울 수 있었다. 뒤에 대구 대성고교 시절. 그는 이미 서정길 악단에 픽업될 수 있었다. 까까머리에 중절모를 뒤집어쓰고 미8군무대 밴드석에서 기타연주를 했다.

 

1956년 드디어 김희갑악단을 창단해 미8군무대를 누볐다. 1958년에는 일반 무대의 밴드마스터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레코딩의 기타리스트로 나서게 된다. 이와 함께 오아시스레코드사 손진석 사장의 권유로 작곡가로 변신했다.

 

그가 ‘하얀 목련’을 작곡할 무렵엔 영화음악을 200여 편이나 한 때여서 영화음악에는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얀 목련’에 더욱 정감 나는 곡을 반사적으로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향수’ ‘사랑의 미로’ ‘우리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그 겨울의 찻집’ 등 많은 히트곡을 낸 자곡가 김희갑. 그의 멜로디에는 항시 감칠맛 나는 한국적 서정성이 묻어 있다. 그리하여 그리움으로 친근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