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45/문화일보)

해군52 2013. 2. 20. 18:41

가면무도회서 만난 연인의 슬픈 사연… 가사 제의 이튿날 전화로 불러줘 탄생

(45) 유호-이봉조의 ‘떠날 때는 말없이’

 

198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있는 문화회관 앞길은 조객들로 붐볐다. 작곡가이자 색소폰 주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봉조의 장례식이 연예협회장으로 거행됐기 때문. 영결식장에는 이봉조의 대표곡. ‘떠날 때는 말없이’가 색소폰의 음율에 실려 흐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똑같은 그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즐거웠죠/아, 그 밤이 꿈이었나 비오는데/두고 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떠날 때는 말 없이 말 없이 가오리다. 아무리 불러도 그 자리는 비어 있네/아, 그날이 언제였나 비오는데/사무치는 그리움을 나 어이 달래라고/떠날 때는 말 없이 말 없이 가셨는가.’

 

대학 축제, 그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두 사람. 둘은 사랑하지만 결국 비련으로 끝나고 만다는 내용을 이 노래는 담고 있다.

 

‘한 잎의 오동잎이 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는 옛 시인의 시구처럼 이봉조도 그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종점’ ‘맨발의 청춘’ ‘안개’ ‘꽃밭에서’ ‘무인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등을 작곡한 이봉조는 55세에 세상을 떴다. 실로 아까운 나이였다. 조객들은 생전의 그의 걸걸한 목소리와 색소폰 연주를 새삼 그리워했다.

 

이봉조는 경남 남해가 고향. 진주중·고교를 졸업했다. 중학 시절 색소폰을 익혀 악대부장을 지냈다. 그가 음악에 눈뜬 것은 당시 진주고 음악교사 이재호의 영향이 컸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일컫던 이재호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남강의 추억’ ‘불효자는 웁니다’ ‘만포선 길손’ ‘무정 열차’ ‘북국 오천킬로’ ‘세세 년년’ ‘대지의 항구’ ‘산유화’ ‘산장의 여인’ 등의 명가요를 남긴 작곡가. 그는 어려웠던 시절, 수십 번도 더 전당포에 잡혔던 바로 그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이때의 영향으로 이봉조는 한양대 건축과를 다니면서도 음악에 열정을 쏟았다.

 

마침내 1965년 그는 TBC의 악단장이 된다. 이때는 이미 작곡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몰고 다니던 청춘스타 신성일·엄앵란이 출연하는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영화 음악을 맡게 된 것이다. 영화주제가 작곡은 이미 마쳤으나 노래시가 문제였다.

 

작사가 유호는 언젠가 이봉조를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KBS의 ‘가요무대’에서 이봉조의 추모 프로그램을, 더구나 피날레에 현미가 부르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들으면서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이 노래를 그가 작곡할 무렵, 이봉조와 나는 똑같이 ‘TBC’ TV에 전속돼 있었다. 그는 악단장, 나는 드라마 작가로 자주 만났다. 성품에 걸맞게 그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가 나에게 작사를 의뢰할 때는 언제나 하는 말이 있었다.

 

“작사하면 유 선생님밖에 더 있습니까.”

 

그날도 예의 말이 오간 후 그는 영화대본 ‘떠날 때는 말없이’를 디밀었다.

 

“곡은 다 돼 있습니다.”

 

이봉조는 텅 빈 스튜디오로 나를 끌고 갔다. 불도 안 켠 그곳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뭔가 흥얼대면서.

 

“어때요? 감이 잡힙니까?”

 

“별로 안 잡히는데….”

 

“작사하면 유 선생님 아닙니까.”

 

“작곡하면 이봉조고?”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로 나는 작사에 들어갔다. 이튿날 그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가사 됐죠?”

 

“아직 안 됐는데.”

 

“급해요, 급합니다.”

 

“알았으니 이따 만나지.”

 

“그럼 전화로 불러 주십시오. 작사하면 유 선생님 아닙니까.”

 

나는 가사를 불러 주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마음에 안 드나?”

 

“아닙니다. 이건 틀림없이 히트할 겁니다.”

 

“노래는 누가 부를 건데?”

 

“노래하면 현미 아닙니까.”

 

“이젠 작사하면 유…”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유호는 1921년 황해도 해주 태생. 본명 유해준. 네 살 때 서울로 이사. 경북고와 일본 도쿄(東京) 미대 도안과를 다녔다. 그의 히트 작사는 ‘신라의 달밤’ ‘고향 만리’ ‘비 내리는 고모령’ ‘서울 야곡’ ‘전선 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럭키 서울’ ‘전우야 잘 자라’ ‘여옥의 노래’ ‘종점’ ‘길 잃은 철새’ ‘카츄샤의 노래’ ‘임은 먼 곳에’ 등 엄청나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