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19/문화일보)

해군52 2012. 8. 8. 11:28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같은 노래… 불황 음반계 메들리 붐 이끌어

(19) 김영광·들고양이들의 ‘마음 약해서’

 

1978년 어느 여름날. 나는 청계천 3가에 있는 호텔에서 작곡가 김영광 씨와 함께 투숙하고 있었다. “… 물론 빠를수록 좋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빡빡하게 시간에 쫓기지는 마십시오. 문제는 대박을 터뜨리는 데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김영광·정두수)에게 작품을 청탁하고 있는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나현구 사장은 목이 타는지 연신 술잔을 비웠다.

 

연세대 음대 작곡과를 나온 그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했다. 그래서 레코드회사를 차리고, 그 자신이 녹음기사로 일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나현구 씨는 작곡가 나운영 선생의 조카. 그리고 가수 김세환 씨와는 이종 간이다. 또 나와는 동갑내기 친구 사이….

 

“두 분이 누구십니까. 당대 최고의 작사·작곡가가 아니십니까. 지금 이 불황을 타개해야 합니다.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단비….”

 

융숭한 대접을 받은 우리는 그날로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창작은 처음부터 비어 있는 창고가 아니던가. 없는 데서 곳간을 가득 채운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

 

“허- 이거 죽겠구먼. 뭐가 나와야지….”

 

곡상이 잘 안 떠오르자 김영광 씨는 애꿎은 기타만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곤 한 잔에 또 한 잔, 그렇게 마셔댔다. 작곡가는 작사가의 노래시가 먼저 탄생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곡이 먼저 나오면 거기에 맞춰서 노래시를 붙일 생각이었다. 누가 먼저 히든카드를 뺄 것인가. 술타령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심기는 착잡했다. ‘작사가 먼저 나오느냐. 아니면 작곡이냐.’

 

그런 어느 날 밤. 창밖에 내리는 밤비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길이 강렬하게 부딪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밤엔 끝낸다. 그리하여 창살 없는 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거다.’

 

“어때? 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 잡지 못했네/돌아서던 그 사람/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내 마음 허전하네요/생각하면 그 얼마나 정다웠던가/나 혼자서 길을 가면 눈앞을 가려/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나는 너를 잡지 못했네’

 

작곡가의 눈에서는 갑자기 광채가 났다. 기타 줄에서는 곡이 튀어나왔다. 일사천리…. 나중에 메들리 붐을 일으키는 ‘짜라짠짜 마음 약해서’의 탄생이었다.

 

이 노래시가 나오기까지는 아랍말인지, 일본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문 외우듯 중얼거리면서 작곡을 하던 김영광 씨가 아니던가. 작품이 완성되자 그날 밤으로 우리는 호텔을 뛰쳐나왔다.

 

임종님과 들고양이들이 부른 이 노래는 가뭄 끝에 단비. 노래의 폭발력은 참으로 위대하다.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음반계는 메들리 붐으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신인가수 주현미는 ‘쌍쌍파티’라는 이름의 메들리로 스타가 되고, 이 여파는 훗날 장윤정으로 하여금 ‘짠짜라’의 히트곡을 남긴다.

 

‘마음 약해서’ 히트 이후, 김영광 씨가 타고 다니던 너덜너덜한 고물차는 문짝도 잘 닫히는 새 차(車)로 바뀌었다. 빛깔이 반짝반짝 빛나는 신형차로….

 

“신칼라, 신칼라….” 김영광 씨의 입에서는 신형차도 ‘신칼라’, 신곡(新曲)도 ‘신칼라’라 해서 ‘신(新)칼라’라는 별명을 듣는다. 4중창단 ‘키보이스’의 창단 멤버이던 김영광 씨는 ‘정든 배’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내 곁에 있어 주’ ‘여고시절’ ‘무정 블루스’ ‘잊기로 했네’ ‘잊지마’ ‘사잇길’ ‘뜻밖의 이별’ 등 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이게 뭡니까- ‘메들리 붐’이 일어났습니다. ‘마음 약해서’가 해냈습니다. 메들리 화약고에 불을 댕긴 겁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울려 퍼지는 노래 메들리를 들으면서 그가 한 말이다. 김영광 씨는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우리말이 약간 어눌하다. 그랬다. 고속도로 휴게소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마음 약해서’가 쏟아져 나왔다.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마음 약해서’가 울려 퍼졌다.

 

‘마음 약해서 너를 보냈네/매달리던 그 사람/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내 마음 허전하네요/생각하면 그 얼마나 정다웠던가/나 혼자서 길을 가면 눈앞을 가려/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가는 너를 잡지 못했네’

 

김영광 씨와 나는 ‘마음 약해서’ 외에도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와 ‘뜻밖의 이별’ 그리고 주현미의 ‘마라도’ 등을 함께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