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20/문화일보)

해군52 2012. 8. 14. 11:30

노래 뺏기고 분 삭히려 오른 용두산서 ‘작곡 공부하자’ 결심해 만든 첫 자작곡

(20)고봉산의 ‘용두산 엘레지’

 

1957년 늦은 봄날. 가수 고봉산(본명 김민우)은 부산 광복동에 있는 용두산 일백구십사계단을 단숨에 오른다. 숨은 찼지만 울화통이 치솟을 대로 치솟은 그는 어떻게 올라왔는지를 모르게 뛰어오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배신을 할 수 있어. 그동안에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이 노래를 연습했는데, 다른 가수에게 음반취입을 시키다니….”

 

고봉산은 부산 앞바다가 환하게 보이는 용두산 정상에 올라와서도 씩씩거렸다. 그가 연습하던 곡은 무적인 이재호 작사·작곡의 ‘울어라 기타줄’이었다. 그러나 지방공연을 오래 하다 보니, 그만 인기 가수 손인호에게 그 곡이 넘어갔다지 않는가.

 

“분하다 분해!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건데, 지방공연에 나서 이 망신을 당할 게 뭐람….”

 

생각할수록 고봉산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그 자신이 작곡을 못해서 생긴 일인데,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날 장탄식 이후, 고봉산은 작곡에 전념한다. 여가만 있으면 피아노 앞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세아 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에게 노래시를 의뢰했다. 그것이 바로 ‘용두산 엘레지’, 일명 ‘추억의 용두산’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디뎌 언약하던/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 사 계단에/사랑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 가고/나만 혼자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아- 못 잊어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 사 계단에/즐거웠던 그 시절은 어디로 가버렸나/잘 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아- 용두산 엘레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눈물 젖은 빵의 맛을 알 수 없다’던가…. 곡이 완성되자 고봉산은 죽어라고 연습을 했다. 팬들의 반응을 보려고 용두산 공원에서 노래를 불렀다. 여기가 ‘용두산 엘레지’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반응이 좋았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작곡기량이나 소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흡족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그는 젊은 시절에 품었던 가수에의 꿈을 이루려고 서울로 남하했다. 박시춘, 문호월, 손목인, 김해송에게 줄을 대어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래서 마도로스 물을 가지고 그는 악극단의 가수로 활약을 한다.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죄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더라/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아아아- 항구의 아가씨/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항구 제2부두/한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야속더라/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테이프가 끊어지면 사랑이 운다/아아아- 항구의 아가씨/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이 부른 ‘아메리칸 마도로스’다. 그러나 고봉산은 ‘용두산 엘레지’의 히트 이후 작곡에 전념한다. 1973년, ‘잘 했군 잘 했어’를 하춘화와 불러 못다 한 가수의 꿈을 한껏 펼쳤던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흘러 왔는지/돌아갈 고향 없는 서러운 가슴/바람 불면 바람 따라 비바람 따라/그리운 그 사람 잊지 못하고/낯 설은 하늘 밑을 헤매고 있네. 어이해 첫 사랑 맺지 못하고/흐르는 강물 따라 흘러서 가나/비가 오면 비를 맞고 세월을 따라/가슴에 새겨진 그 이름 부르며/오늘도 타향 길을 흘러서 가네’

 

정두수 작사, 고봉산 작곡의 이 노래 ‘철새’는 남진이 처음 부르고 나중에 나훈아가 불렀다. 철새는 철을 따라 서식지를 옮기면서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렇게 못 하는 새도 있다. 늙고 병든 새는 그만큼 세월에 상처도 깊어 기력(氣力)이 떨어진다. 팔팔하던 고봉산도 그랬다. 왕성하던 의욕과 집념은 어디로 가고,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다. ‘물새 한 마리’ ‘꽃 한송이’ ‘유달산아 말해다오’ ‘섬 처녀’ ‘항구’ ‘추억의 꽃나무’ 등 고봉산의 작곡은 매우 서정적이었다.

 

뻥이 세다 해서 고대포(高大砲)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도 아주 겸손해졌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 인생은 다 그런 것인가. 본디 심성이 착한 고봉산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타계하고 만다. 그의 나이 60세. 요즘 같으면 한창 전성기가 아닌가. 술 한잔도 마실 줄 모르지만 필자와 함께 있을 때면 곧잘 노래를 잘하던 고봉산. 그의 애창곡은 ‘철새’였다.

 

‘어디서 왔는지, 흘러 왔는지/돌아갈 고향 없는 서러운 가슴/바람 불면 바람 따라 비바람 따라/그리운 그 사람 잊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