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뺏긴 슬픔 ‘주막’에 비유… 어느 날짜 오시겠소…희망담아
(22)박영호·백년설의 ‘번지없는 주막’
우리 민족은 유목민이 아닌데도, 일제강점기 때, 어쩔 수 없이 집시처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궂은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 구려/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이 부른 이 노래, ‘번지 없는 주막’은 당시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동포들의 통한(痛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주거할 집이 있겠는가. 그래서 주막에도 문패와 번지수가 없었다.
1940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불사조)는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 부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다. 힘든 등산길이었다. 백두산은 역시 민족의 성산(聖山)답게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와 골짜기가 앞을 막았다. 일행이 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비를 만났다. 그들은 지친 나머지, 비도 피할 겸 해서 어느 주막에 들렀다. 이른바 ‘아리랑 술집’…. 백두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이름 모를 주막집이었다. 통나무를 베어 흙을 발라 추위와 비바람을 겨우 막을 수 있을 만큼 얼기설기 지은 집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주막 주인은 그래도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하여 밤이 으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인다. 도토리 술은 도토리를 가루로 빻아 누룩에 담근 술이다.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술에는 피가 터졌소/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밖에는 여름비가 줄줄이 퍼붓고 있었다. 호롱불을 줄이면서 비를 바라보고 있던 박영호는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시를 쓴다. 기가 막힐 심정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맨 먼저 해방가요 제1호 ‘사대문을 열어라’를 쓰게 된다. 이때의 비참한 울분을 노래에 쏟았던 것이다.
‘사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반만년 옛터에 먼동이 튼다/노동자야 농민아 청년 학도야/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쇠사슬을 끊어라 날개를 펴라/반세기 눈물이 아랑곳이냐/자유민아 동지여 해외 동포야/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태양 위에 걸어라 우리의 이상/자유와 평등의 징을 울려라. 용광로야 괭이야 무쇠 마차야/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만주 이민사’를 다룬 ‘등잔불’을 희곡으로 썼던 작사가 박영호는 황폐한 조국 산하를 두고 노래시로 이렇게 읊었다. 피폐하고 황폐한 우리 사회를 번지 없는 주막에 비유한 것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박영호는 희곡 ‘장님의 동생’을 시작으로 ‘팔백호 갑판상’ ‘정어리’ ‘등잔 불’ ‘겨레’ 등 많은 공연 작품을 썼다. 왕평과 이서구의 권유로 1932년 폴리돌 레코드사에 ‘세기말 노래’(김탄포 작곡, 이경설 노래)를 발표한다. 작사로서는 데뷔작이었다.
‘명색이 사나이라 울긴들 하랴/울음을 웃음삼아 노래 부른다/내 가슴 벌판위에 재를 뿌린 그대는/오늘밤 어느 땅에 잔을 들고 우느냐.’
1939년에 발표한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채규엽이 부른 ‘기타에 울음 실어’라는 노래이다. 얼마나 지독한 가슴앓이인가. 울려야 울 수 없는 한(恨)과 울분이 쌓였는 데도 소리내어 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 않겠는가.
‘기차는 떠나 간다 보슬비를 헤치며/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마음 달래자/공수래 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이 노래 ‘정한의 밤차’는 ‘만주 이민사’를 다룬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박영호의 작사활동은 그가 ‘시에론’ ‘OK’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장 시절 이뤄진다.
‘짝사랑’ ‘요핑계 조핑계’ ‘연락선은 떠난다’ ‘유랑극단’ ‘인생극장’ ‘북국 5천킬로’ ‘만포선 길손’ ‘세세연연’ ‘화물선 사랑’ ‘아리랑 낭랑’ ‘망향초 사랑’ ‘직녀성’ 등이 그것이다. 그는 당시, 조명암과 함께 우리나라 작사계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이었다.
‘타홍아 너만 가고 나만 혼자 버리기냐/너 없는 이 천지는 불 꺼진 사막이다/달 없는 사막이다 눈물의 사막이다/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두 바다 피를 모아 한 사랑을 만들 때는/물방아 돌아가는 세상은 봄이었다/한양(漢陽)은 봄이었다 우리도 봄이었다/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식은 정 식은 행복 푸른 무덤 쓸어안고/타홍아 물어보자 산새가 네 넋이냐/버들이 네 넋이냐 구름이 네 넋이냐/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일본 검열반으로부터 ‘한양은 봄이었다. 우리도 봄이었다’라는 노래시가 조선 민족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하여 사상문제로 금지곡이 된 ‘눈물의 백련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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