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몰랐네∼ 그리울 줄은’ 고향 못가는 안타까운 마음 담아
(23) 백영호·배호의 ‘내 고향 남촌’
내 시와 노래는 금오산(일명 소오산) 자락에서 샘솟았다. 금오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최남단이 아닌가. 정상에 오르면 남해바다 한려수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남해, 삼천포, 거제, 통영, 사천, 진주. 그리고 광양과 여수가 손에 닿을 듯이 두루 보인다. 이뿐이겠는가. 전북 진안의 마이산 서편,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남해바다에서 긴 여정의 몸을 푸는 섬진강 하구도 보이는 것이다.
금오산을 길게 휘돌아 흐르는 주교천은 질펀한 들녘을 이루면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내가 태어난 성평마을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천리길이기에 고향에 가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두고 노래샘을 가슴의 항아리에 길어 올렸다. 성평리에서 학교는 시오 리 길. ‘매곡재’는 지름길이었다. 이 고갯길에 오르면 가슴이 뚫렸다. 학교와 면사무소가 보이고 주교천 따라 멀리 섬진강이 보였기 때문. 이뿐만 아니라 하동 장날이면 뱃고동소리도 아련히 들려왔던 것.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고향 학교로 전학한 나는 오뉴월 남풍이 부는 날은 매곡재에서 하모니카를 불어댔다. 뭉게구름이 궁전을 짓는 하늘은 너무나 눈부셨던 것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핀 들찔레조차….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젖나무와 상수리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룬 매곡재는 학교에서 귀가할 때면 나는 여기서 꼭 하모니카를 불곤 했다. 하모니카는 내 분신. 늘 나와 함께 동행했다. 그런 어느 날.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부산으로 전학 가기 위해 전학증명서를 떼고 집으로 가던 길. 그날따라 매곡재는 나를 슬프게 했다. 학교로 가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보따리 둘러메고 넘던 고갯길. 나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하모니카를 불어댔다. 그런데 매곡재 소나무 숲에서 누가 나타났다. 한 반에서 절친하게 지내던 쌍둥이 남매였다.
“너 정말 하모니카 잘 분다. 나는 학예회 때 들어보곤 처음이야…. 한 곡 더 들려줄 수 있겠니?” 쌍둥이 누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도 곧 서울에 갈거야.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진학을 위해서…. 그동안 정들었는데 먼저 떠난다니 섭섭해….”
“나는 방학 때면 만날 줄 알았는데….”
“우리도 그러길 바라지만 서울에서 한번 오기가 어디 쉽겠니?”
그녀 남매도 나처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전란을 피해 서울에서 할아버지 댁으로 피란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난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 그녀는 눈이 맑았던 만큼 심성이 곱고 공부도 잘했다. 이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6·25가 발발하면서 소식이 끊겼다. 나는 시를 썼다. 노래시는 더 많이 썼다. 그녀에게 애타는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쯤 고향집에는 떠날 때 심어놓은/ 하얀 목련꽃이 달빛에 젖으면서 곱게 피겠네/ 몸은 떠나도 마음속엔 사무치는 고향/ 머나먼 남쪽 하늘에 구름이 흘러갈 때/ 아름다운 아름다운 사랑의 꽃을 피우리.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아련히 반겨주던/ 하얀 고향초가 이슬에 젖으면서 시들었겠네/ 몸은 떠나도 마음속엔 사무치는 고향/ 아득한 고향 하늘에 철새가 날아갈 때/ 내 마음은 고향 하늘에 여울져 흘러서 가네.’
이미자는 역시 노래를 타고난 천재 가수. 이 무렵 애틋한 내 마음을 마치 알기라도 하듯 가곡풍의 이 노래를 애절하게 불렀다. 1965년에 쓴 필자의 노래시 ‘고향의 꿈’에 박춘석 씨가 곡을 붙였던 것.
1972년 배호가 부른 정두수 작사, 백영호 작곡의 ‘내 고향 남촌’은 그때 고향에 못 가는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남촌이 그리워서 눈을 감으면/ 남풍 따라 스며드는 찔레꽃 냄새/ 황토길 10리 고개, 재 너머 오면/ 얼룩무늬 황소가 울던 내 고향/ 언제 다시 가보나, 내 고향 남촌. 남촌에 부는 바람, 꽃이 피는데/ 남풍 따라 밀려오는 고향 냄새/ 꽃구름 흘러가는 정든 포구/ 떠날 때는 몰랐네, 그리울 줄은/ 어이해서 못 가나, 내 고향 남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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