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38/문화일보)

해군52 2012. 12. 26. 11:04

입대 전날 작사… 전방서 노래 들어… 女가수 목소리에 초소서 외친 ‘윤희’

(38) 차경철-박재란의 ‘님’

 

“와아, 와아, 우우….”

 

어느 전방부대 연병장에선 한겨울의 칼바람을 가르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연예인 위문 공연단이 쓸쓸한 전방을 찾아온 것이다.

 

1961년 겨울 당시 인기 정상의 가수 박재란(본명 이영숙·천안 태생) 일행은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병들과 어울려 하나가 됐다. ‘맹꽁이 타령’‘푸른 날개’‘럭키모닝’ 등 발랄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그녀는 미모에다 사근사근한 폼, 그리고 나긋나긋한 말씨로 장병들을 열강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연신 앙코르가 터져 나오고 그때마다 박재란은 두 말 없이 무대에 다시 섰다.

 

“저는, 오늘 장병 여러분들께 신곡 ‘님’을 선사하기에 앞서 이 노래의 작사가 차경철 선생님을 한번 찾아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부탁을 올립니다. 차 선생님은 2년 전에 입대하면서 이 애절한 가사를 만들어 작곡가 한복남 선생님께 보냈습니다. 지금쯤 아마도 차 선생님께서는 상병이 되셨겠네요. 여러분! 되도록 이 노래를 많이 불러 주셔요.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작사가란 걸 기억해 주시고…. 아울러 이 박재란이도 많이 사랑해 주셔요. 호호호….”

 

장병들은 작사가가 같은 동료라는 소리에 더욱 더 열광했다. ‘육군장병’이라는 말은 공감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병든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서로 만나 헤어질 이별이건만/맺지 못할 운명인 걸 어이하려나/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 /애달피 울어봐도 맺지 못할 걸/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바로 이 시각에 이 노래의 작사가 차경철(본명 차익준) 상병은 보초를 서며 박재란이 부르는 ‘님’을 스피커를 통해 듣고 있었다. 전방의 싸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차 상병은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윤희와의 추억은 그를 끝내 울게 만들었다. 그는 바람에 서걱대는 잡초 주위를 맴돌며 ‘윤희야! 윤희…’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차익준의 고향은 경남 울주. 윤희와는 소꿉친구. 둘은 한 마을에 살며 십오 리 솔밭 길을 함께 걸어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직물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차익준은 부산으로 가 부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윤희는 울산여중으로 가고.

 

당시 중학교는 6년제, 두 사람은 방학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었다. 방학 때 만나면 그들은 태화 강변이나 칠암포 바닷가를 찾았다. 무슨 사랑이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어느덧 ‘연인’이었다. 차익준은 본디 말이 없는 데다 문학도여서 고작 푸시킨의 시나 읊어주고 윤희는 그저 듣기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중학을 졸업한 그는 문학을 계속하고 싶어 서울대 국문학과에 원서를 디밀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손자의 진학을 말렸다. 외동아들인 차익준의 아버지가 고향에 머물지 않고 객지로만 떠도는 걸 못마땅해 하던 할아버지는 손자만은 고향에 눌러 앉혀 결혼도 시키고 증손자도 보고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삼대독자. 그래서인지 손자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차익준이 어릴 때부터 무릎에 앉히고 ‘초한지’며 ‘삼국지’ 등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손자의 ‘호연지기’를 키워 주었다.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친구의 손녀딸을 손자의 색싯감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어른들끼리의 정혼은 당시로선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차익준은 대학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그와 윤희는 술에 수면제를 타서 같이 마시기도 여러 번 했으나 그때마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가눌 길 없어 군대에 자원입대키로 했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이기에.

 

입영열차에 타기 하루 전날 밤. 그는 밤새워 술을 마시며 ‘님’이란 가사를 썼다. 이튿날 이 노래시를 부산 아미동에 있던 도미도레코드사의 한복남에게 부쳤던 것이다. ‘님’이란 노래는 대 히트를 하며 영화 ‘창살 없는 감옥’을 낳게 했다. 이 노래비는 그의 고향 경남 울주군 온양읍 대운산 앞에 서있다.

 

‘원통하게 죽었구나, 억울하게 죽었구나/몸부림친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마산 시민 흥분되어 총칼 앞에 싸울 적에/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남원 땅을 떠날 적에 성공 빌던 어머니는/애처로운 주검 안고 목메어 슬피 울 때/삼천 겨레 흥분되어 자유 민주 찾으려고/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손인호가 부른 ‘남원 땅에 잠들었네’의 이 노래는 3·15 부정 선거를 항의하다 숨진 당시 고등학생 김주열 열사의 고향이 전라북도 남원이기에 그런 것. 이후 마산 시민들은 순국의 넋을 기리기 위해 ‘3·15 성지’에 노래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