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서 스치듯 만났던 여인 못잊어 그리움에 지쳐 詩 되었네
<37> 이미자의 ‘그리움은 가슴마다’와 ‘못잊을 당신’
1965년 말. 나는 겨울 바닷가로 나갔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송년회’다 ‘망년회’다 하여 열리는 술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몇 잔 하는 게 고작. 그것도 진통과 산고를 치르는 창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충동이었다. 망망대해, 동해 바다는 드넓었다. 이제 나는 짙푸른 겨울 바다에 안겨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된다. 그리하여 몇 번 왔던 어부의 집으로 들어섰다. 며칠 묵고 가기 위해서였다.
겨울 바다는 한적했다. 그야말로 종일을 가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적막하고 고즈넉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황혼녘이면 나는 무료한 나머지 독서를 하거나 해변을 거닐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바닷가를 거니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 여인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호젓이 거닐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지만 그 여인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여인이 혼자인 줄을 몰랐다.
그 이튿날도 다음 날도 황혼녘이면 혼자서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을 보고서야 동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묵고 있는 집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혹시 저 여인을 아십니까? 어느 집에서 투숙하고 있기에 이맘때면 저렇듯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지?”
“알다마다요. 대학에 다닐 때부터 겨울이면 이 어촌에 왔거든요. 3년 전에는 약혼자와도 다녀갔는데….”
집주인의 말에 나는 퍼뜩 스쳐가는 여인의 불행이 떠올랐다. 혼자가 된 여인에게는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이날 밤. 나는 다음 날 황혼녘을 기다리면서 겨우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내일이면 그 여인을 다시 볼 수 있었기에…. 하지만 다음 날 그 여인은 해변에서 볼 수 없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여인은 떠난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 여인으로 하여 공허해졌다. 그러나 내 술잔에는 차고 넘치는 게 있었다. 노래시였다.
‘생각하면 그 얼마나 꿈같은 옛날인가/그 세월 잃어버린 서러운 가슴/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워하면서도/입술을 깨물며, 당신 곁에/가지 못하오. 옛 추억의 하루해는 오늘도 저물건만/그 세월 잃어버린 사무친 가슴/장미꽃은 시들어도 사랑은 별과 같이/영원히 비춰도 당신 곁에/가지 못하오.’
‘못 잊을 당신’이라는 노래시를 쓴 다음 나는 다시 한 편의 노래시를 쓴다. ‘그리움은 가슴마다’였다.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으로 내 가슴에 다가섰던 여인.
‘애타도록 보고파도 찾을 길 없네/오늘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그리움만 쌓이는데/밤하늘에 잔별 같이 수많은 사연/꽃은 피고 지고 세월이 가도/그리움은 가슴마다 사무쳐 오네. 꿈에서도 헤맸지만 만날 길 없네/바람 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서러움만 쌓이는데/밤이슬에 젖어드는 서글픈 가슴/꽃이 다시 피는 새봄이 와도/그리움은 가슴마다 메아리치네.’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그래서 가슴이 저미도록 못 잊어 하는 게다.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 한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김지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못 잊을 당신’에서 이미자가 부른 이 노래는 감미로우면서도 애절했다. 마치 샘물이 철철철 넘치듯 맑은 음색과 성량. 한마디로 신선하면서 정갈했던 것이다. ‘그리움은 가슴마다’ 또한 정감으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사랑은 그리움이며, 기다림 그리고 외로움이기에.
나는 어촌에서 며칠 묵는 동안, 두 편의 노래시를 더 쓰게 됐다. 우연히 만난 그 여인으로 하여 노래시가 샘처럼 솟아났던 것.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내 어이 사랑했나 상처 준 그 님을/이렇게도 애태우며/사랑하고 있어요, 언제까지나/사모하고 있어요, 영원토록/당신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옛날엔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고/대답해 주세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내 어이 믿어왔나, 돌아선 그님을/꿈에도 잊지 못해서/그리면서 살아요, 마음 다 바쳐/기다리고 있어요, 언제까지나/당신 곁에만 있게 해 주세요/옛날엔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고/대답해 주세요.’
나는 그 여인이 거닐던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대답해 주세요’를 썼다. 이후 나는 이미자에게 ‘한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석양’ ‘삼백리 한려수도’ ‘자주댕기’ ‘그때가 옛날’ ‘정착지’ ‘정든 섬’ ‘황혼의 블루스’ ‘비에 젖은 여인’ ‘고향의 꿈’ ‘가을 초’ ‘꽃잎은 외로워도’ ‘네온의 블루스’ ‘타국에서’ 등 많은 노래를 함께 하면서 콤비의 두터운 성을 쌓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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