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39/문화일보)

해군52 2013. 1. 9. 11:07

호언장담 뒤 떠오르지 않던 曲想… 연애시절 아내와의 이야기서 탄생

<39> 손석우-손시향의 ‘검은 장갑’

 

1958년 1월. ‘검은 장갑’의 작사 작곡가 손석우는 이날 KBS 신년 특집방송을 마치고, 방송국의 전속 가수들과 어울려 ‘산길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환담을 즐기고 있었다. KBS는 당시 남산에 있었고 ‘산길 다방’은 그 맞은편에 위치했다. 손석우는 이때 KBS 악단장으로 음악에 대한 젊은 날의 열정을 신인가수 발굴과 작품에다 쏟았다.

 

방송국 주제가 1호인 조남사 작사 ‘청실 홍실’을 작곡해 송민도, 안다성 듀엣으로 부르게 했다. 이 밖에도 ‘꿈속의 사랑’ ‘물새우는 강언덕’ ‘청춘 고백’ ‘즐거운 잔칫날’ ‘그러긴가요’ ‘검은 스타킹’ ‘청춘 목장’ 등 실로 많은 가사와 작곡을 그는 썼던 것이다.

 

특히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에 가수 현인이 그 화려한 창법으로 부르던 중국인 양악음 작곡인 ‘몽증인’을 손석우는 ‘꿈속의 사랑’이란 가사를 붙여 널리 애창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손석우의 음악적 재능과 진면목은 ‘눈이 내리는데’ ‘꿈은 사라지고’ ‘내 고향 진주’ ‘나 하나의 사랑’ ‘이별의 종착역’ ‘노란 샤쓰의 사나이’ ‘우리 애인 올드 미쓰’ ‘내 사랑 쥬리안’ ‘우리 마을’ ‘석양의 밀감밭’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상업성을 탈피한 건전하고 밝은 내일의 우리 가요를 지향하기 위해, 손석우는 이때 그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KBS가 해마다 발굴하는 신인 가수 선발에 기대를 걸었다.

 

이날, 남산 ‘산길 다방’ 창밖으로 신년 벽두의 분위기를 장식하는 함박눈이 진종일 내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노래의 화제로 옮겨졌다. 노래의 패턴을 보다 음악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싶어하던 손석우는 동료들의 화제가 노래 쪽으로 모아지자, 갑자기 그의 목소리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묵한 성격의 그도 노래에 관해서는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 어디 그림으로 예를 하나 들어 보자구. 그림이 되는 소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 쓰레기 더미도 그림으로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문제는 우리 일상생활을 어떻게 예술성으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거지.”

 

평소의 신념을 피력하던 손석우의 눈길이 앞자리에 앉아있는 가수 김성옥에게로 갔다. 김성옥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

 

“김성옥이 끼고 있는 ‘검은 장갑’도 바로 노래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거야.”

 

함박눈을 맞으며 이날 집으로 돌아온 손석우는 집에 와서도 ‘신길 다방’에서 그가 한 말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검은 장갑을 노래로 만들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한 것이 어쩐지 쑥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신중히 생각해서 말해야 하는 건데 내가 좀 말이 앞섰어. 그러나 어쩌랴! 이미 장담한 약속인 걸! 요는 검은 장갑의 노래를 만들어 내는 일만 남은 거다….

 

일단 오선지에 ‘검은 장갑’이라고 크게 써놓았다. 하지만 시상이나 곡상이 좀처럼 떠오르지를 않았다. 먼저 가사가 나와야 멜로디도 쉽게 진행 되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내 최의덕이 차를 끓여 와서는 피아노 위에 놓으며,

 

“어머? 당신. 우리들의 연애 시절을 노래로 만들려고 하는 군요? 검은 장갑이라고 쓰인 걸 보니…, 호호호. 그렇죠?”

 

아내는 창밖에 내리고 있는 함박눈에 눈길을 주며, “생각하면 그때 겨울은 왜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지 모르겠어요, 눈 오는 날이면 당신은 나를 꼭 밖으로 불러내서는 늦도록 까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집 앞까지 바래다줄 때도 헤어지기 싫어 ‘검은 장갑’을 낀 내 손을 꼭 잡고서는 놓아주지를 않았죠.”

 

손시향이 부른 ‘검은 장갑’은 이날 아내의 이야기에서 탄생됐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검은 장갑 낀손/할말은 많아도 아무말 못하고/돌아서는 내 모양을/저 달은 웃으리.’

 

‘검은 장갑’을 부른 가수 손시향은 당시 한국의 이브 몽땅이라고 일컫던 샹송 가수. 우아하고 부드럽던 그리고 매혹적인 달콤한 그의 음색은 ‘거리를 떠나’ ‘비오는 날 오후 2시’ ‘이별의 종착역’ 등을 불러 그 시대 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다. 마치 아련한 그리움처럼 우리 곁에서 사라진 그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는 밤길/토라져서 가는 검은 스타킹/무엇에 틀렸는지 인사도 없이/토라져서 가는 검은 스타킹’

 

손석우 특유의 정감이 녹아 있는 눈 내리는 밤의 그리운 풍경화 같은 이 노래 ‘검은 스타킹’은 1962년, 허스키 가수 한명숙이 불러 ‘검은 장갑’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