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강서구 염창동과 강북구 석관동은 같은 서울이기는 하지만 서쪽과 북동쪽이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지하철로 이동하면 9호선, 5호선, 6호선을 갈아타면서 26개 정거장을 지나야 하고, 걷는 시간까지 더하면 1시간 반쯤 걸린다. 이런 먼 길을 가끔씩 토요일 오후에 오고간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는데 갈 때는 기대 가득, 올 때는 행복 가득!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가면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씩 ‘올드시네-한예종 희귀필름컬렉션’ 상영회가 열린다. 제목만 알던 영화, 또는 제목조차 모르던 작품, 국내에 전혀 소개되지 않은 걸작들이 대형 스크린에 펼쳐진다. 매번 걸작 영화 두 편을 보는데 영화 초고수들의 봉사 정신과 번역자들의 노력 그리고 회원들의 영화 사랑이 만나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영화 좋아하는 나에게는 바로 ‘행복한 영화세상’이다. 회원 중에는 세종, 천안, 용인, 청라, 부평에서 오시는 분들도 있으니 나 정도는 먼 것도 아니다.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게 되고 다음 모임이 기다려진다.
어제도 두 편의 영화를 봤는데 이 모임이 아니면 볼 수 없었을 희귀작에 걸작들이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영화의 여운만으로도 당분간 행복할 것 같다.
1. 외인부대 Le grand jeu (1954)
1930년대 흑백영화를 컬러로 리메이크한 프랑스 영화로 칸영화제 대상 후보작이다. 독일 출신의 로버트 시오드맥 감독은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자이고, 20여 편의 할리우드 영화 포함 6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도 나에게는 전혀 낯선 이름이다. 올해 초 타계한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반전을 가져오는 1인 2역을 맡았는데 단연 발군이다.
미모의 연인과 동거하고 있는 젊은 변호사가 분수에 넘치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가 파산하고 무일푼으로 해외로 도피한다. 만나기로 한 연인은 나타나지 않고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은 외인부대에 들어가 알제리로 떠난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술집을 드나들던 주인공은 놀랍게도 술집에서 춤을 추고 있는 헤어진 연인을 만나지만 그녀는 마음이 변했는지 그를 알아보지 못 해서 애를 태운다.
이런 주인공 남녀와 그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남녀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에는 사랑과 미움, 욕망과 미련이 난무하고 놀라운 반전이 관객의 허를 찌른다.
2. 유리벽 속의 여인 La ragazza in vetrina (1961)
‘광부와 창녀’ 두 커플의 서로 다른 사랑을 그린 이탈리아 영화로 네덜란드의 탄광과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홍등가를 배경으로 한다.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엠머 감독은 밀라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예술다큐를 만들었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와 로맨틱코미디물을 연출했다고 한다. 60여 편을 연출했고,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에서 작은 상도 받았다는데 이 감독 역시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이탈리아 출신이면서 프랑스 국민배우의 반열에 오른 리노 벤츄라가 출연하는데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힘 빼고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인물은 능력 있는 광부이지만 술과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말썽을 일으키면 대책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돈을 벌기 위해 네덜란드 탄광까지 온 신참 광부를 홍등가로 데리고 가서 인생교육을 시키는데 순수한 청년은 홍등가에서 만난 직업녀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이들을 상대하는 홍등가의 두 여인 중 한 명으로 마리나 블라디가 출연하는데 20대 초반의 그녀는 한 마디로 ‘관능 대폭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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