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Road 2004년/한국/95분
감독 배창호
출연 배창호, 강기화, 설원정, 권범택, 백학기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말까지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전라도 시골 출신인 대장장이의 인생을 플래시백으로 담아낸
로드무비 형식의 시대극으로 배창호 감독의 17번째 작품이다
배 감독과 20여명 스태프들이 8개월 촬영기간 동안 총제작비
5억 원을 들여서 만든 저예산 영화로 2004년에 완성되었지만
개봉관을 찾지 못한 채 필라델피아와 우디네 영화제를 거치고
2년이나 지난 2006년 말에 그것도 소규모로 겨우 개봉되었다
(배 감독의 표현대로 ‘익다 못해 시어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배 감독이 주인공 대장장이 역을 직접 맡아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배 감독의 <정>(1999)에서 데뷔한 아역
출신 강기화가 주연을 맡았을 뿐 스타급 출연자는 전혀 없다
폭력과 섹스 그리고 빠르고 화려한 CG가 넘치는 할리우드식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이겠지만
진부함 속에 애증의 인연, 관용과 용서, 기억과 그리움 등이
주는 울림이 크고, 황량한 시골 풍경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광주국제영화제 폐막작이자 CJ아시아인디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고, 필라델피아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골 장터가 아직 우리네 삶에서 풍요로웠던 1970년대 중반,
대장장이 태석(배창호 분)은 이십년 넘게 무거운 모루를 지고
전국의 장터를 떠돌며 칼을 만들고 다듬는 일을 하며 지낸다
태석은 대장장이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고달프고 각박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런 이유로 왜소해지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느 날 다음 장터를 향해 길을 가던 태석은 폭설로 버스마저
끊긴 시골에서 앳된 외모의 처자 신영(강기화 분)을 만나는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이라고 하는 그녀는 장례에는
어울리지 않을 빨간 코트에 커다란 스마일배지까지 달고 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신영을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태석은 길을 가는 동안 줄곧 오래된 지난 옛일을 떠올린다
세상없이 사랑했던 그의 아내(설원정 분), 그녀가 있기에 매번
돌아갔던 작은 초가집,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득수(권범택 분)
그러나 그를 이십여 년 동안이나 집에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든
득수의 배신까지 미움과 그리움이 얽힌 기억 속 길을 걷는다
그리고 태석은 신영이 원수 같은 득수의 딸임을 알고 충격에
휩싸이지만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길을 걷는다
신영을 데리고 득수의 집에 도착한 태석은 생각하지 못 했던
득수의 장례를 보면서 득수를 향한 미움을 마음에서 씻어낸다
태석은 원수처럼 여겼던 득수의 장례를 마치고 득수의 딸에게
장터에서 벌었던 돈까지 모두 넘겨주고 다시 길을 떠나는데...
사회성이 짙은 <꼬방동네 사람들>(1982)로 데뷔한 배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 영화를 압도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고래사냥>(1984),<깊고 푸른 밤>(1985),<기쁜 우리 젊은 날>
(1986) 등 80년대 최고 흥행작들을 만들면서 관객들과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배 감독은 대중성보다 전통과 예술적 성취에 눈을 돌려
<황진이>(1986>,<꿈>(1990),<러브스토리>(1996),<정>(1998)
등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만들었고, 블록버스터
<흑수선>(2001)을 거쳐 다시 독립영화인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소박하지만 다정한 길의 풍경이 많이 등장하는데
독립영화의 한계를 넘기 위해 발품을 팔아 담아낸 전국 각지
'길'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시리게 할 만큼 아름답고,
여기에 연출자의 넉넉한 시선이 더해져서 따뜻함이 전해온다
대학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 서왔던 배 감독은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8), 자신이 연출한 <러브스토리>(1996)에 이어
세 번째로 주연을 맡으면서 투박하지만 진솔한 연기를 펼친다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배 감독이 주연을 맡기로 했다는데
캐스팅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는 방편이기도 했겠지만 또한
주인공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에서 무거운 모루를 지고 전국의 장터를 떠돌면서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살아가는 자존심 덩어리인 대장장이의 모습은
고집스레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지켜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는 장인으로서의 배 감독 자신과 닮아 보인다
“독립영화가 곧 돈 적게 들이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죠.
자본으로부터 창작의 정신을 지키는 영화를 말하는 거에요.
자본이 주인공이 되면 영화의 개성이 없어져요. 천만 명이
좋아하는 영화뿐 아니라 만 명을 위한 영화도 나와야죠.”
배 감독의 이런 생각이 영화시장에서도 제 ‘길’을 찾기 바란다
* 배창호 감독의 다른 작품들
꼬방동네 사람들 (198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4)
고래사냥 (1984)
깊고 푸른 밤 (1984)
황진이 (1986)
기쁜 우리 젊은 날 (1986)
꿈 (1990)
젊은 남자 (1994)
정 (1999)
흑수선 (2001)
배창호 감독 데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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