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고향찾아 멀고먼 길을 가는 추석 전전날이지만
찾아갈 고향도 없고 철도 없는 아저씨들 셋이 뭉쳐서
휴전선 가까이에 있는, 이름도 낯선 복계산으로 간다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해발1057미터 복계산(福桂山)은
광주산맥에 속하며 대성산과 복주산에 접해 있는데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했다는 매월대와
철원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폭포 등이 유명하다고 한다
세종16년(1434년)~성종24년(1493) 살았던 천재기인 김시습은
22세에 세조의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참화를 듣고 이를 비관하여
세속을 떠나 광인을 자처하며 걸식 행각으로 도처를 방랑했는데
그가 잠시 은거했던 이곳 마을을 매월동이라 했다고 하며
산 입구 주차장 옆 허름한 작은 식당에도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역시 주차장 옆에 있는 절인지 암자인지
건물 생김생김이며 유리창에 써 있는 휴대폰 번호하며
매월당의 역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몇발짝 산쪽으로 들어가니
계곡에 걸친 나무다리와 허름한 집 몇채가 보이는데
이곳이 1996년 SBS 특집드라마 ‘임꺽정’과
드라마 ‘덕이’ ‘황진이’ 등을 촬영한 청석골 세트장이다
이건 뭐에 쓰는 건물인고?
해우소?
여기 산신령이 나타날 듯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도 또...
전부 드라마를 촬영하던 자연세트장인가 보다
급한 일도 없으니 인적 드문 산길을 쉬엄쉬엄 올라가는데
다리만 바쁜 게 아니라 입도 귀도 쉬임없이 바쁘다
대통령 후보 하겠다고 나선 누구누구들
깜이 되느니 안 되느니...
젊은 여인과 예술적 동지가 된 그 사람,
그들이 주고받았다는 아름다운 편지들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현금 백만원을 달라고 한다며
결혼은 남자 혼자만 했냐고 하면서 억울해 하는 친구
누구는 할 말이 없어서,
누구는 할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어서...
이래저래 살기 힘든 남자들
친구의 말에 상처 받는다고 하면서도 낄낄대고 웃지만
그들 가슴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을까?
복계산 정상까지 올라가기도 전인데
자리를 깔고 신발까지 벗고 눌러앉아 배낭을 뒤져보니
김밥, 사과, 떡, 빵, 생선포 그리고 캔맥주, 스카치보리물까지...
맥주와 스카치보리물을 타서 마시니
조금 전까지 걱정하던 일들, 상처받은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즐겁게 사는 일이 이리도 간단한데...
해발 1057.2미터 복계산 정상
산과 산 사이에 작은 평야도 보인다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이 서울이 되었을지도...
전형적인 가을 남자의 표정인 이 친구는 해우 중일까?
먼 곳을 바라보는 이 친구는 땅 살 곳을 고르는 중일까?
(이 친구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한동안 옥신각신 하더니 겨우 합의가 되서
같이 땅을 사기로 한 걸까, 나만 빼고?^^
북녘을 바라보니 억새풀 너머로 민통선 안의 대성산이 보인다
며칠후 평양에서 벌어질 미팅에서 오고갈 대화를 예상해 보며
‘이번에는 제발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할텐데...’
별 걱정을 다 해야 하니 이 나라 국민 해먹기도 어렵다^^
정상을 지나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데다가 발길이 뜸한 곳이고
습기도 많아서 미끄럽기까지 하니 올라갈 때보다 더 힘이 든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무공해 계곡물을 만나니
여름은 다 지났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잠시 발만 담가보다가 그냥 온몸을 담그고 만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름도 낯설은, 처음 가보는 산에서 여유작작하다 보니
어느덧 해는 저서 어두운데 깊은 계곡은 끝날 줄 모르고
타잔이나 나올법한 길없는 길을 넝쿨을 헤치면서 지나고
물이 불어난 계곡을 아슬아슬하게 넘고 또 넘으면서
산에서 이 밤을 어찌 새울까 내심 걱정걱정하게 된다
마침내 보이는 민가의 불빛,
청석골 세트장으로 무사히 하산하여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겨우 조난의 공포에서 벗어난 탓인지 저녁 때가 지났지만
한동안 배고픈 줄도 모르다가 신철원 거리의 불빛 사이로
식당 간판들이 보이자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그런데 한 친구가 굳이 전어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아니 남도 바닷가도 아니고 강원도에서 웬 전어를...?'
두부, 산채, 갈비, 한정식...
철원에서 일동을 지나 포천까지 나를 부르는 수많은
식당 간판을 스쳐지나면서 배는 점점 더 고파오고...
해저문 심산유곡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나왔더니
'전어찾아 삼만리' 하느라 아사 반보직전인가 싶었는데
포천 어드메에서 기어이 전어집을 찾아내서
전어무침과 전어구이 그리고 매운탕으로 포식을 한다
전어 몇 마리에 배가 부르니 그냥 만사 오케이,
전어를 먹자던 그 친구가 밥값을 냈으니 용서해 주기로 하고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다시 수다 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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