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09/문화일보)

해군52 2012. 5. 30. 11:09

북간도 동포의 애환 고스란히 恨서린 가락으로 서러움 더해

⑨ 백난아의 ‘찔레꽃’

 

‘찔레꽃’은 그 이름처럼 가시가 있는 꽃. 하지만 우리는 궁핍했던 어린 시절에 밭두렁에서 언덕 위에 핀 찔레꽃에 처음 돋는 새순(筍) 껍질을 벗겨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인가, 눈물겹도록 정다운 꽃이 찔레꽃이 아니던가. 1943년 8월 어느 여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패전 위기에 발악하던 일제는 강제징병제 동원령을 내린다.

 

학생은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사지(死地)에 내몰리고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갔다. 징집과 함께 징용이 실시돼 한반도에 젊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징용 영장을 받은 우리 동포들은 비행장 노역자로, 탄광 광부로, 부두에서 막노동하는 잡부로 일하면서 혹사당했다.

 

찔레꽃은 우리 민족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꽃이다. 빛깔이 호들갑스럽지도 않은 은은한 향기로 열정과 끈기를 나타낸다.

 

북간도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 질곡의 역사 속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동포들의 개척지다. 물론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이기도 했다.

 

만주 지린(吉林)성은 남동쪽의 왕칭(王淸), 옌지(延吉), 허룽(和龍), 훈춘(琿春)의 4현을 말하며, 북간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함경북도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동해 바닷가의 연해주(沿海州)를 끼고 있는 것이다.

 

1943년. ‘불효자는 웁니다’의 작사가 김영일이 북간도에 갔을 때는 음력 5월쯤, 그러니까 6월이었다. 찔레꽃이 한창 피는 모내기철에 함경북도를 통과하는 간도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북간도에 사는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리 동포들의 삶의 역사가 밴 터전이라서 그런가. 북간도 찔레꽃은 유난히 붉고 아름다웠다. 민족의 애환이 꽃잎마다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좀 보게나. 이 아이가 그토록 자네를 따르던 정순일세. 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해서 내가 서둘러서 시집을 보냈지…. 큰오빠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 가장으로서 말일세.”

 

보통학교 졸업 때 찍은 사진에서는 정순이가 세 동무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꽃송이 같은 처녀들의 탐스러운 얼굴이었다.

 

“정순이 친구 중에서 한 처녀는 정신대로 끌려갔다지 뭔가….”

 

서울에 돌아와서도 김영일은 친구의 이야기를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북간도 찔레꽃과 함께 사진 속의 세 동무를 떠올리면서 노래시를 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배긴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날아드는 북간도(北間島)/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백난아는 제주도 태생이다. 그러나 함경북도 청진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가족이 모두 청진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풍부한 성량과 구성진 가락의 소녀가수 오금숙(백난아의 본명)은 15세 나이로 태평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콩쿨대회’에서 1등으로 뽑힌다.

 

심사위원은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작사가·시인·희곡 작가)를 비롯하여 천아토(작사가 겸 레코드사 기획담당), 김교성(작곡가), 이재호(작곡가), 그리고 가수 백년설 등이 맡았다.

 

당시 태평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백년설은 오금숙에게 백난아(白蘭兒)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난초처럼 곧고 순결한 품위를 항상 지니라는 뜻에서다. 난초처럼 한평생을 청아하게 살다가 찔레꽃같이 아름답게 그리운 노래들을 쏟아 낸 가수 백난아.

 

‘아리랑 낭낭’을 부르고, ‘직녀성’ ‘갈매기 쌍쌍’ ‘낭랑 18세’ ‘금박댕기’ 같은 명곡을 남기고 그녀는 갔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찔레꽃은 피었다.

 

찔레꽃의 작곡가 김교성의 별명은 ‘콩쿨대왕’이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인가수 선발전을 하도 많이 열었기에 붙여진 것이다. ‘등외 입상’이라는 제도는 그가 만든 것이다. 설령 노래는 당선권에 못 들어도 상을 많이 배려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것이라 하겠다.

 

작사가 김영일. 작곡가 김교성. 가수 모두 타계했지만, 노래는 무엇이기에 이렇듯 가슴을 저미는가.

 

찔레꽃 한(恨)이여, 서러움이여, 그리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