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12/문화일보)

해군52 2012. 6. 20. 11:15

포성멈춘 戰場, 잠시 고향생각… 구슬픈 노래시로 그리움 달래

(12) 신세영의 ‘전선야곡’

 

1952년 여름 어느 날.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은 부산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제주도 훈련소의 군예대가 부산을 찾아와서 군인과 경찰 가족, 그리고 시민을 위한 사기 진작 및 단합을 위해서였다. “유호 씨. 우리 군가라기보다 진중가요 같은 것을 하나 만듭시다.” 유호는 얼핏 생각이 나질 않았다.

 

“지금 일선에서는 서로 밀고 밀리고 하는 모양인데, 전투가 소강 상태일 땐 군인들이 어떻게 지낼까?”

 

“글쎄요?”

 

“일선과 후방, 군인 나간 사람과 그 가족들….”

 

박시춘은 기타를 퉁겼다. 단칸짜리 어두컴컴한 방…. 유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어린 나이에 일선 참호에서 적진을 노려보고 있을 우리 국군들이 떠올랐다.

 

가을이 되면 가랑잎도 날릴 것이고, 겨울이면 눈보라도 칠 것이다. 총을 겨드랑이에 껴안은 채, 잠시 고향 생각도 할 그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노래시는 쉽게 나왔다. 2절도 함께 이어졌다. ‘전선야곡’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3절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노래의 마무리이기 때문. 노래는 언제나 3절이 압권이어야 한다. 백미는 모두 거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유호 씨. 내친김에 3절까지 완성해야 할 게 아니오. 퍼뜩 쓰고 우리 나가서 한잔 쭉 들이켭시다. 허허….”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한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 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 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어/ 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 아- 다시 한번 보았소.’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이 부른 ‘전선야곡’이다.

 

가수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해방가요 ‘귀국선’을 맨 처음 취입했지만 음반 상태가 나빠 음반을 못 내고 말았다. 그래서 선배 가수 이인권이 다시 불렀다. 그리하여 신세영의 데뷔곡은 ‘영너머 고갯길’로 기록된다.

 

‘영너머 고갯길 이백 팔십리/ 임 보고 싶은 마음에 달려왔건만/ 샛별 같은 두 눈이 너무도 차가워/ 말없이 떠나가네/ 아, 서러운 바닷길. 조국과 더불어 싸우는 몸은/ 가시밭 언덕인들 못 넘으련만/ 거짓 없는 그대 눈 못 보고 가는 게 한이 되어/ 아, 날으련다 아, 비 오는 부두야.’

 

음악 재능이 뛰어난 신세영은 작곡도 했다. ‘청춘을 돌려 다오’가 그것이다. 다정다감했던 신세영. 참 열정적인 가수였다.

 

작사가 유호 선생과 작곡가 박시춘 선생은 누구인가. 가요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천재 작사·작곡가.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낭랑 18세’ ‘럭키 서울’ ‘고향은 내 사랑’ ‘전우여 잘 자라’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주옥같은 명가요를 탄생시킨 콤비다.

 

유호 선생은 극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당시 동양방송국에 ‘유호극장’이 있을 만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특히 해방가요 ‘신라의 달밤’은 고도 경주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비 내리는 고모령’은 옛날 ‘고모역’에 세워져 있다.

 

‘아아ㅡ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 위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