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26/문화일보)

해군52 2012. 9. 26. 21:26

이틀밤 녹음실서 꼬박 산고끝 탄생… 꾹꾹 참고 견디는 남자의 마음 노래

(26) 김병걸 ― 조항조의 ‘사나이 눈물’

 

1991년 여름 어느 날. 작사가 김병걸은 서교동에 있는 음반 녹음실에서 이틀째 밤을 새운다. 가수 조항조가 부를 노래시를 쓰기 위해서다. 창작은 작가(시인)의 피를 말리는 작업. 고수 김병걸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피우다가 만 담배.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꽁초. 열댓 장은 족히 될성싶은 파지엔 깨알 같은 사연들이 얼마나 고쳐 썼다가 지웠는지 그 흔적이 참혹했다.

 

기획자 장고웅 사장과 가수 한혜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병걸은 벌써 2시간이 넘었는데도 꼼짝 않고 벽만 응시하고 있었다. 단 한 줄. 12자. 노래의 도입부인 이 12자의 확정을 위해 작사가는 무려 이틀을 녹음실에서 보냈다.

 

“내 오늘은 기필코 끝낼 것이다.”

 

결의에 찬 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담배를 연신 피워댄다. 기침을 쿨룩대면서도 연거푸 입에 무는 담배….

 

‘지금 가지 않으면 못 갈 것 같아/아쉬움만 두고 떠나야겠지/여기까지가 우리 전부였다면/더 이상은 욕심이겠지/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까만 숯덩이 가슴 안고/삼켜버린 사나이 눈물/이별할 새벽 너무 두려워/이대로 떠납니다. 돌아서서 흘린 내 눈물 속에/우리들의 사랑 묻어 버리면/못다 부른 나의 슬픈 노래도/바람으로 흩어지겠지/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까만 숯덩이 가슴 안고/삼켜버린 사나이 눈물/아침이 오면 너무 초라해/이대로 떠납니다.’

 

고통의 산고 끝에 ‘사나이 눈물’이 탄생됐다. 살면서 까맣게 숯덩이가 된 가슴이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들 삶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 김병걸 작사, 이동훈 작곡, 조항조의 이 노래는 대박이었다.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꾹꾹 참고 견디는 남자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리하여 조항조는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노래에 이어 ‘남자 시리즈’를 발표하게 된다. 1990년대의 큰 수확이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것.

 

작사가이면서 작곡가인 김병걸은 필자의 문하생 중에서도 걸출했다. ‘낙동강’ 등 시집을 상재하기도 한 그는 ‘다 함께 차차차’ ‘찬찬찬’ ‘도시의 삐에로’ ‘그 사람 찾으러 간다’에서 비범한 재주를 보이기도 했다. 문학성과 음악성의 조화를 이룬 결실이라고 하겠다.

 

작곡가 이동훈은 경남 고성 사람. 최진희의 노래 ‘카페에서’의 작곡에 이어 ‘사나이 눈물’로 명성을 떨친다. 김병걸과 조항조의 만남은 1989년에 이뤄진다. 김병걸이 찬불가를 만들면서 조항조가 동참했던 것. 당시 ‘아세아 레코드사’ 박성호 전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병걸에게 “김 대감(김병걸). 우리 원표(조항조 본명) 노래 너무 아깝지 않아요. 김 대감이 어떻게 좀 해봐요”라며 조항조의 홍보를 했다.

 

만날 사람은 기어이 만난다고 했던가. 인연은 엉뚱한 곳에서 비롯되었다. 가수 이은하를 키운 매니저 박영걸이 다리를 놓아 조항조에게 악보를 건네준 것이었다.

 

‘아쉬움에 울던 이밤이 가면/우린 이제 영원히 타인인 것을/그대 눈빛 속에 비치는 것은/여기 내가 아니었나요/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너/그 마음에 누가 있나요/믿고 믿어왔던 우리 사랑/촛불 되어 꺼져 가는데/이별할 새벽 너무 두려워/이대로 떠납니다.’

 

악보를 건네받은 조항조는 곡은 마음에 드는데 노래 내용을 다른 테마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노래시는 노래의 핵심. 작곡가 못지않게 가수가 노래시를 가장 잘 알기 때문. 그래서 ‘이대로 타인’이라는 노래가 ‘사나이 눈물’이 된 것이다.

 

가수 조항조는 ‘서기 1999년’이란 보컬의 리드 싱어. 1970년대 말 ‘포구’라는 노래로 데뷔했다. 서정성 짙은 매혹적인 음색, 뛰어난 가창력. 이제 그는 폭발적인 인기로 정상에 올랐다.

 

‘신 트로트 황제’ ‘가슴으로 노래하는 남자’ 등으로 불리는 조항조는 다양한 무대에서 애절한 음색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올해 초에는 한 텔레비전 방송의 특집프로그램에서 나훈아의 ‘영영’을 랩을 가미시킨 폭발적인 느낌의 곡으로 바꿔 불러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세대를 넘나드는 화합의 노래였다는 평가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