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언덕에서의 가슴시린 이별 담아… 송창식·윤형주의 감미로운 음색 매력
(33) 트윈폴리오 ‘하얀 손수건’
1960년대 중반. 캠퍼스에서는 청년문화가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른바 청년문화로 상징되는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대학생들은 청바지를 입고 생맥주를 마시며 기타를 치면서 포크송으로 젊음을 발산했던 것. 그래서인지 명동과 종로 그리고 무교동에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특히 무교동의 ‘세시봉’은 매주 금요일 밤마다 ‘대학생의 밤’이 열렸다. 이상벽(경음악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되던 이 프로는 당시 아마추어 대학생 가수들의 꿈의 무대. 포크송 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기에 인기는 사뭇 높았다. 그리하여 출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67년. 송창식과 윤형주는 이곳에서 만난다. 22세의 동갑내기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취향이 같아 이듬해 보컬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한다. 서울예고 출신의 송창식은 그때 홍익대 청강생. 윤형주는 연세대 의예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히쭉히쭉 웃거나 머쓱해하던 송창식. 하지만 그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때면 객석을 압도한다. 절창이었던 것이다. 매혹적인 음색에서 뿜어내는 소리는 타고난 소리꾼. 팝송뿐만 아니라 대중가요에서도 그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던 것. 그것이 오늘날 송창식을 우뚝 서게 했다. 윤형주 또한 감미로운 음색과 포근함을 안겨 주는 가수. 정갈한 노래의 맛은 격조가 높았다. 한마디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하모니는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행복한 아침’ ‘더욱더 사랑해’ ‘빗속을 울며’ ‘모닥불’ ‘낙엽’ ‘에델바이스’ ‘이별’ ‘슬픈 운명’ ‘고별’ ‘회상의 노래’ 등을 불러 원곡 못지않은 감동을 주던 트윈 폴리오는 팬들이 확산되자 방송에 진출한다. 그들의 인기는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엔/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욱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고향 언덕에서 이별하던 정경이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조용호 작사의 번안곡 ‘하얀 손수건’은 당시 우리 사회상과도 맞물려 있었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산업화 시대였다. 노래는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것. 그래서인가. ‘하얀 손수건’은 시대적 정서가 됐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
그러나 트윈 폴리오의 활동 기간은 2년도 채 못 돼 해산한다. 윤형주의 학업 문제가 이유였다. 송창식은 텅 빈 구멍 뚫린 가슴을 안고 방황한다. 하지만 이 기간에 그는 우리 음악을 발견하게 된다. 국악을 바탕에 둔 대중가요 말이다. 서양 음악은 동양인이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 것. 그래서 알기 쉬운 우리 노래를 부른다.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 도는 떠돌이/ 멋진 피리 하나 들고 다닌다/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거센 눈보라가 닥쳐도/ 은빛 피리 하나 불면서/ 언제나 웃고 다닌다/ 갈길 멀다 우는 철부지 새야/ 나의 피리 소리 들으려므나/ 삘리리- 삘리리-/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 도는 떠돌이’
‘우리는’ ‘왜 불러’ ‘고래 사냥’ ‘가나다라’ ‘토함산’ ‘내 나라 내 겨레’ ‘꽃보다 귀한 여인’ ‘새는’ ‘그대 있음에’ ‘선운사’ ‘참새의 하루’ ‘좋은걸 어떡해’ 등 자작곡을 만든다. 포크송 시대의 서막이었다.
한편 트윈 폴리오의 해체 이후, 윤형주는 경희대로 옮겨 학업에만 전념한다. 하지만 그의 열렬한 팬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에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침이슬 내릴 때까지/ 별이 지면 꿈도 지고 슬픔만 남아요/ 창가에 피는 별들의 미소/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겨울 눈 내리던 창가에 앉아서/ 단 둘이 나눈 영원한 약속/ 잊을 수가 없어요’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함께 속삭이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 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라라라 라라라…’ 청순하면서도 발랄한 그의 노래시는 여름날 해변을 뜨겁게 달구었다.
1971년. 음악계에 복귀한 윤형주는 동아방송 심야 프로 ‘0시의 다이알’에서 DJ로서도 성공한 통기타 가수 1세대였다. 그는 ‘세시봉’ 열풍이 불면서 올해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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