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따라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34/문화일보)

해군52 2012. 11. 28. 22:50

연분홍 치마의 처녀시절 어머니 사진 화재로 타버려 그 모습 그리며 읊조려

(34) 손로원 ‘페르시아 왕자’·‘봄날은 간다’

 

사시사철 검정 고무신에 검정 점퍼를 입고 다니던 작사가 손로원은 부산 피란 시절의 ‘막걸리 대장’. 그는 작사료보다도 술을 먼저 챙겼다. 그래서 막걸리 대장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952년 어느 가을날. 손로원이 부산 광복동에 있는 초원다방에 들어서자 동료들은 모두 놀랐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드나들던 손로원이 달포 만에 그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

 

“그동안 어찌된 일입니까? 나는 귀신이 잡아간 줄로만 알았지요? 하도 안 보이시길래…. 허허허…. 문제는 황제 ‘빽’ 갖고도 못 구한다는 그놈의 ‘술’인데 지금도 안녕하시겠지요? 설마하니 그걸 손 대감(손로원의 별명) 혼자서 다 자시지는 않았을 테고….”

 

손로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며 작곡가 한복남이 안부(?)까지 살피고 있는 그 술은 다름 아닌 바로 ‘루이 13세’를 말함이었다. 본디 화가이기도 한 손로원은 어느 토요일 오후. 그림을 그리려고 부산 태종대 바닷가로 나갔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한눈에도 그가 프랑스 장교임을 알 수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장교는 영어로 인사를 청해 왔다. 손로원의 그림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주머니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어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잔이 채워지자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는 건배가 제의됐다.

 

십년지기처럼 다정한 술잔이 몇 차례 오고 간 다음, 프랑스 장교는 지갑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며 그의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금발의 중년 여인은 뛰어난 미인이었다. 프랑스 장교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손로원은 쾌히 승낙을 했다. 초상화가 완성되자 손로원은 장교의 막사를 찾아갔다. 그림을 본 장교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끄집어내어 주는 것이었다. 술만 갖고 집에 온 손로원은 이날부터 그 술을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제조 연대가 100년도 넘는 프랑스 최고의 명주 루이 13세였기에.

 

“루이 13세만이 오직 그 권좌에서 이 술을 음미했을 뿐, 그 누구도 이 술을 마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암! 왜냐하면 루이 13세는 당시 페르시아 시장에서도 구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암….”

 

손로원은 동료들에게 침을 튀기며 술 자랑을 해댔다.

 

“자갈치 시장에 가서 우리 회나 좀 먹읍시다. 오랜만에….”

 

한복남의 말에 손로원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술을 가지고 왔으면, 피란통에 고생하는 동료들과 함께 딱 한 잔씩 마시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려 자갈치 시장에 왔을 때였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한곳을 주시하며 웅성댔다. 용두산 판자촌에 불이 났던 것이다. 요란하게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소방차가 급히 달려가는 게 보였다. 이때 손로원의 다리는 이미 중심을 잃고 휘청대고 있었다.

 

“아이고 내 술! 아이고….”

 

지금 손로원이 탄식하는 건 바로 루이 13세였던 것.

 

“나는 술 향기마저 맡는 걸 아까워서 사양했거늘 저놈의 불길은 어찌 한 입에 깡그리 마신다는 말인가?….”

 

이날 충격으로 손로원은 며칠 뒤에 ‘페르시아 왕자’와 ‘봄날은 간다’를 쓴다. 그날, 화재는 벽에 걸어둔 어머니의 사진마저 태워버린 것.

 

처녀 시절 어머니는 연분홍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항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흰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달이 뜨면 함께 웃고 달이 지면 함께 울던/얄궂은 그 세월에 봄날은 간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시아 왕자/눈 감으면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어이해서 사랑에는 약해지던가/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의 공주/오늘밤도 외로운 밤 별빛이 흐른다. 약해서야 될 말이냐 페르시아 왕자/모래알을 움켜쥐고 소근거려도/어이해서 사랑에는 약해지는가/아라비아 공주는 마법사 공주/오늘밤도 외로운 밤 촛불이 꺼진다.’

 

다작가 손로원은 그의 대표작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고향의 그림자’ ‘즐거운 목장’ ‘물레방아 도는 내력’ ‘귀국선’ ‘비 내리는 호남선’ ‘마음의 자유천지’ ‘짝사랑’ ‘백마강’ ‘경상도 아가씨’ ‘샌프란시스코’ ‘홍콩 아가씨’ ‘인도의 향불’ ‘마음의 고향’ ‘엘레나가 된 순이’ 등 참으로 많은 명가요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