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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표정관리를 (2002.0101)

해군52 2002. 1. 1. 14:21

 

<모델 에이전시>를 하는 친구가 있다. 좀 생소한 직업이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델을 구하는 사람과 모델을 하려는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일이다. 광고화면에 등장하는 유명 연예인은 물론이고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들도 출연 교섭은 모델 에이전시가 한다. 좀 특수한 직업소개업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벌써 4~5년 전이던가, 어느 날 그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 모델 한번 해보지 않을래?"

"모델? 한번 해볼까? , 해 보지."

"그래, 그럼 사진부터 찍어라."

"알았어."

 

그리고는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한참 후 그 친구가 사진 독촉을 했다. 모델이라는 게 그냥 되는 게 아니고 일단 모델 에이전시에 사진을 첨부해서 등록을 해야 한단다. 그 사진이라는 것도 그냥 보통 사진이 아니고 복장도 갖춰 입고 제법 폼을 재고 찍은 것이라야 한단다. 독촉을 받으면 그러마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이 나이에 쪽팔리게 무슨 사진을 찍냐고 생각하면서 대충 뭉개고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다시 사진 얘기를 하면서 강남에 있는 사진관(유식하게는 스튜디오라고 한다)에 예약을 해 놓았으니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하니, 성의가 괘씸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해서 그 사진관, 아니 스튜디오에 갔다. 어느 건물 지하실에 있는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벽면에 사진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데 웬 잘 생긴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냥 기가 죽을 정도였다.

 

커다란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그것도 그냥 찍는 게 아니었다. 미용사 아가씨가 나타나서 얼굴에 분 바르고, 눈썹 그리고, 머리를 다듬고 난리였다. 그냥 도망 나오고 싶었다.

 

"그냥 찍으면 안 되나요?"

 

그리고는 카메라 앞에서 온갖 포즈를 잡아가면서 사진을 찍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앉았다가, 섰다가, 오른쪽, 왼쪽, 팔짱을 끼었다가, 턱을 고였다가, 자켓을 걸쳤다가, 벗었다가...

 

어찌어찌 스튜디어에서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야외 촬영이란다. 이건 진짜 사건이었다. 끌려간 곳은 백주의 압구정동이었다. 카페 앞에서, 옷가게 쇼윈도우를 배경으로, 주차한 차 앞에서, 퇴화된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가면서 수십 장 사진을 더 찍었다. 지나가는 아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상당히 쪽팔렸지만 이왕 뽑은 칼이니 뭐든지 자르긴 해야 한다고 굳세게 마음먹고 촬영을 마쳤다.

 

"스타 되기가 어디 그리 쉽겠나?"

 

며칠 후 친구 사무실에서 내 사진을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얼굴 표정이 좀 어색하긴 해도 쓸 만해 보였다. 사진 기술이 좋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진이 몇 군데 모델 에이전시 사무실에 보내졌다.

 

"이제부터는 내가 매니저다."

"그래라."

 

그렇게 그 친구는 내 매니저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오디션을 받고 정말로 CF 한편에 출연했다. 대사도 없이 나레이션 처리를 하긴 했지만 여하튼 나는 이렇게 늦깎이 CF 모델 데뷔를 했다.

 

벌써 여러해 전의 일이지만 그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이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웃고 살았었나? 나잇살이나 먹은 인간이 그것도 사내가 웃고 있으면 맛이 간 거 아니냐고 하는 풍토에서 몇십 년을 살아왔으니 어찌 잘 웃어지겠나?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말이다.

 

얼굴 표정을 만드는 근육도 팔다리 근육과 마찬가지로 자주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고 한다. 평소에 잘 웃지 않고 몇십 년 살다보니 웃을 때 움직이는 근육이 퇴화해서 웃으려고 해도 잘 웃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해야 했다. 잘 안 움직이면 볼펜으로 입술 옆쪽을 억지로 당겨 올려가면서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미친 짓 하는 것 같았지만 자꾸 해 보니까 그런대로 할 수 있었다.

 

항상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져 있기 마련이고, 웃고 지내면 웃는 얼굴이 되어 있기 마련이다. 항상 감사하면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얼굴이 너무도 편안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억지로 웃지 않아도 웃는 얼굴이 아주 편해 보여서 부럽다.

 

다른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조금이라도 즐거운 마음이 들도록 새해부터는 표정관리를 열심히 해야 하겠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 주 : 나의 모델 활동은 그때 그 한번으로 끝났다. 아마도 모델 에이전시 접대를 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