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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눈으로 본 부모 (2001.1230)

해군52 2002. 1. 1. 14:09

 

제가 언젠가 한번 저희 가족이 '코스비 가족' 같다고 했더니 그걸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니신 부모님이 좀 원망스럽군요. 사실 저희 가족은 그렇게 웃기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저 다른 가족들과는 좀 다르게 모두 엉켜서 살아가는 이상한 사람들일 뿐이죠. 부모와 자식인지, 친구인지가 좀 구별이 안될 뿐이란 말입니다.

 

먼저, 항상 노래만 부르고 다니시는 우리 아빠, 어제도 신곡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시더군요. 근데 전 가르쳐 드리고 싶지가 않아요. 귀찮아서가 아니라, 요즘 노래는 아빠의 트로트식 창법에 어울리지 않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아빠의 목을 거쳐 트로트가 되어 나오는 걸 들으면 소름이 돋습니다. 하지만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습은 본받을 만 하죠. 노래방 가면 18번 하나 정해놓고 맨날 부르는 엄마보다는 나으니까요.

 

울 엄마요? 귀엽죠. 제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엄마인 것 같아요. 요즘은 웬일인지 살이 빠져서 아쉽지만, 엄마 배에 제가 기억하는 한 항상 둘러져있던 살들은 우리 식구들의 휴식과 기력 충전소였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엄마가 그 살들과 협력해서 훌라후프 대회에서 1등을 했다지 뭐예요? 어떤 몰상식한 아줌마가 우리 엄마랑 계속 같이 해서 공동 1등이었긴 하지만, 엄마의 유연함은 우리 식구 중 누구도 따라올 수 없죠.

 

우리 엄마를 수식하는 단어 중 하나는 건망증인데요, 요즘 제가 관찰해 본 결과로는 그게 건망증이 아니라 무관심증인 것 같아요. 남들 얘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아이들이 대화하기를 싫어해서 못 살겠다는 엄마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우리 엄마는 왜 내가 얘길 해도 듣지를 않을까요? 제 얘기가 재미없는 거 아니냐구요? 에이,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전 재밌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점 중 하나죠.

 

우리 아빠가 술을 싫어하는 거 알고 계신가요? 매일 술 마시고 들어와서는 몸무게부터 재시는 우리 아빠, 70kg이 사선이라나 뭐라나, 매일 체중계 눈금을 의심하시곤 한답니다. 그리고 "오늘 안에 들어갈게" 해놓고 왜 안 지키시는 건지.. 엄마가 이거 때문에 삐졌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근데 아까는 엄마가 ", Honey.." 이러면서 전화하더라구요. ,너무 징그러워서 닭살에 왕소름까지 돋더라구요. 세상에, 이게 웬말입니까? 다 큰 딸 앞에서 민망스럽지도 않은지..

 

이 정도가 우리 부모님 흉일까요? 사실은 아니에요. 아무리 저를 파출부로 부려먹으며 설거지만 시켜도, 가습기 물 채우라고 가습기 옆에서 제 방에 있는 저를 불러도, 술 취해서 아무리 저를 귀찮게 해도 저는 저희 엄마 아빠를 사랑합니다. 위에서 제가 헐뜯은 닭살스런 말은 엄마 아빠의 아기자기한 사랑 중 하나죠. 저는 이렇게 예쁘게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이 정말 좋아요. ... 하긴, 설거지 매일 하는 게 지겹긴 하죠. 그치만 그것도 맨날 하면 괜찮아요..^^;

 

 

* : 위 사진에 보이는 딸이 스무살 즈음에 쓴 글이다20여년 지난 지금 딸은 월요일을 싫어하는 중견 직장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