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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환이를 보내며 (1997.0513)

해군52 2002. 1. 1. 13:30

 

 

봄이면 라일락 향기가 코를 찌르던 경희궁에서의 6년 세월-꿈처럼 아스라이 멀어진 그 시절!

 

병상에서 너는 그 시절이 그리웠더냐?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라일락꽃을 그리워하고 네 딸아이가 따다준 라일락꽃 향기에 빠져들다가 라일락꽃 피는 계절에 우리 사랑했었네 라일락꽃 입에 물고서 우리 사랑했었네~~’라는 아주 오래된 노래 몇 소절을 흥얼거리곤 하던 네가 라일락 향기가 사라지자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가는구나.

 

언제나 우리를 즐겁게 했던 너의 끊임없는 재담도, 어느 모임에서나 청중을 매료시켰던 너의 노래도 이제는 다시 들어볼 수가 없구나. 너와 함께 즐겨 부르던 노래 향수도 이제는 함께 할 수가 없구나.

 

가곡이든 팝송이든 가요든, 노래라는 노래는 모두 다 네가 부르기만 하면 우리의 넋을 빠지게 했었지. 네 노래를 듣고 나면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또 너도 노래하기를 무엇보다 좋아했었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네 노래를 듣는 즐거움을 준 것만으로도 넌 축복받을 수 있을게다

 

일환아!

 

우리 인생살이가 즐거울 수만은 없다마는 길지도 않은 네 인생에는 왜 그리도 어려움이 많았더냐! 이루고 싶었던 꿈, 학교, 직장생활, 사업 그리고 건강까지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았구나.

 

지난 40 여년 동안 네가 겪어야 했던 그 숱한 사연들은 마치 소설에서나 있음직한 기이한 것들이었지. 성치 않은 몸으로 만주벌판을 헤매며 네 목숨을 구해줄 명의를 찾아다녔건만 끝내는 가고 마는구나.

 

언젠가 네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일이 조금만 되려고 하면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런 너의 운명도 이제는 더 이상 네 발목을 잡을 수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막을 수도 없을 게다.

 

네가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어려움일랑 저 청계산자락에 날려버리고 가거라! 네가 못이룬 꿈에 대한 좌절과 회한일랑 흘러가는 저 강물에 띄워버리고 가거라! 힘들고 지친 네 병든 몸일랑 이 세상에 버려두고 가거라!

 

새로운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놓고 해 보려무나!

네가 사랑하는 결이, 솔이 쌍둥이 남매가 너 없이도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힘들고 지친 네 몸과 마음을 쉬게 하려무나!

 

일환아!

 

너를 보내는 오늘, 네가 좋아하는 비가 이리도 많이 내리는구나. 네가 이 세상에서 겪어야했던 어려움만큼 새로운 세상에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기에 우리 친구들은 너를 기쁜 마음으로 보내련다.

 

이제 저 하늘나라에서 네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노래를 네 마음껏 부를 수 있겠구나. 아무도 네 발목을 잡지 않을 그곳에서 네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할 수 있겠구나.

 

일환아!

 

네가 병상에서 불렀던 그 노랫말처럼 라일락꽃 피는 계절에 우리 다시 만나서 향수를 함께 부를 수 있을 때까지 편히 쉬거라!

 

일환아, 잘 가거라!

 

1997513

친구들을 대신하여

 

 

==> 나일환, 'Unchained Melody'노래 듣기!

05 Unchained Melody.mp3
8.5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