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태백산행에 우리 동행이 모두 17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은퇴한 주먹 한넘이 있었다. 그넘은 우리 친구 중 어떤 녀석과 알고 지내더니 이렁저렁 많이들 알게 돼서 가끔씩 우리 산행에 따라다니곤 했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내 다리통만한 팔뚝하며, 보기에도 벌써 한 등치 하는 폼이 심상치 않은데, 나이가 몇 살 아래라고 우리 친구들을 만나면 첫마디부터 깍듯이 형님이라 부른다.
산행 후 지하수를 사용하는 목욕탕에서 느긋하게 목욕 잘 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목욕탕을 나섰다. 눈에 젖은 등산화를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고 가져간 운동화를 신으니 발도 한결 편했다. 이제 남은 일은 식당에 가서 잘 먹고 기차 타는 일뿐이었다. 식당에서 보내 준 봉고차를 타고 상쾌한 기분을 즐기고 있는데 그때 바로 그넘이 차에 오르더니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것도 호남 원단 발음으로 말이다. (전라도 본토 발음으로 써야 실감 날 텐데, 사투리가 영 안 된다)
말인즉. 어떤 놈이 자기 등산화를 훔쳐갔다는 것이었다. 그 등산화라는 게 사이즈가 무려 300미리나 되는 놈이라서 전국을 뒤져서 겨우 하나 건져가지고 이제 4번째 신은 신발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40몇 만원을 주고 샀는데 아직 길도 들기 전에 어떤 죽일 놈이 낡은 신발 그것도 이렇게 작은 걸 남겨 두고 훔쳐갔다고 방방 떴다. 설마 누가 등산화를 훔쳐갔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데다가 듣고 보니 성질이 날 만도 하겠다 싶어서 그냥 듣고만 있을 수밖에...
식당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넘의 아우성은 계속되었다. 차안의 모두는 어정쩡하지만 그 발언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신발을 훔쳐간 범인도 기차를 탈 테니까 역에 가서 기다리면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몇 명이 동조했고 그넘도 그러겠노라고 하면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기차역으로 향해 달려갔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설마 등산화를 누가 훔쳐 갔을라구?’
‘저넘이 지가 잘못 신고 나와서 저러는 거 아닌가?’
‘만일 등산화를 훔쳐갈 놈이라면 미쳤다구 기차역에 나타나겠나?’
넘치는 식욕으로 강원도 한우고기와 참이슬을 때려먹고 역 앞으로 가니 그넘은 아직도 광장에 서서 신발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바보가 아닌 담에야 신발 훔쳐간 놈이라면 벌써 날라 버렸지, 기차역에 나타날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면서 내가 참 똑똑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다가,
그러다가
내 시선이 그넘이 신고 있는 등산화로 가게 되었는데,
‘아니, 저거 내 신발 아냐?’
‘언제 저넘이 내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냐?’
‘내 배낭 속에 넣은 등산화가 왜 저넘 발에 신겨 있는 거지?’
(상황 파악이 됩니까? 아직 잘 안 되는 분들을 위해서 얘기를 계속하면...)
배낭을 열고 봉지에 싼 등산화를 꺼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발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300미리짜리 등산화가 어째서 여기 있단 말인가?’
(이제는 상황 파악이 되시죠? 아직도 안 되는 분들은 연락주세요^^)
이렇게 해서 등산화 도둑(?)이 잡히자 그넘이 전국에 내렸던 300미리 등산화 도둑 수배령와 조직원 비상동원령은 즉시 해제되었다. 함께 있던 등산팀 친구들은 모두 웃느라고 뒤집어졌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그넘은 내게 말했다.
"형님, 형사문제는 몰라도 민사문제는 안 끝났소잉. 내 이 막대한 정신적 피해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이 움직인 비용은 어찌 보상할 꺼요?“
* 주 : 그로부터 6년여가 지난 2008년 여름 친구 몇 명과 함께 남도를 찾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그넘을 만나 완도에 있는 산에 올라갔다. 6년 전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표지석 앞에서 그넘의 제안으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위 마지막 사진) 사건 당일 내가 신었던 낡은 등산화는 나와 오랫동안 동행하다가 몇 년 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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