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내 방은 언제나 잘 정리된 상태였다
내가 없는사이 누가 방에 들어와서
책상서랍을 열어봤다든가
책장에 꽂힌 책을 빼봤다든가 하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만큼 그랬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내 주변을 그렇게 정리하려고 했었다
흐트러진 이부자리, 널려있는 옷가지
구석에 쌓여있는 먼지, 내팽겨진 신문잡지...
이런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다가 보니까 뭔가 이상했다
이부자리 정리해 놓으면 또 흐트러지고
옷가지 치워놓으면 또 널려져 있고
먼지 털어내고 나면 또 쌓여 있고
신문잡지 접어 놓으면 또 펼쳐져 있고...
결혼 초기에 처갓집에 가보면
식구들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는 어수선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다들 그런 것이 익숙해서 그런지
큰 처남은 방이 잘 정리되어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니
나로서는 이해 곤란이었다
그런 집안 출신이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
한쪽에서는 열심히 정리하면
또다른 한쪽에서는 열심히 어질러놓고
끝이 없는 반복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정리하면서 살다 보니까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고
역할이 잘못된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애써 참으면서
그냥 내버려두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서
눈에 거슬리던 장면들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상대방도 조금씩 정리를 하면서 살게 되더니
친정에 가면 정신이 없다나 어쨌다나...
지금은 나부터도
옷 벗어서 아무 의자에나 걸쳐놓고
가방, 지갑, 수첩, 열쇄, 휴대폰...
이런 것들 그냥 아무데나 놓았다가
필요할 때면 찾느라고 한참 난리를 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옛날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더라면
아마 정리정돈 노이로제 걸렸을꺼야>
그런데 애들을 보면 서로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딸아이 방은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아들 녀석 방은 언제나 정신이 없는 상태이다
그 녀석은 제 침대 위에다 옷, 양말, 가방, 책...
별별것들을 다 늘어놓아서
손바닥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게 해 놓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다른 방까지 어지르고 다닌다
참 묘하게도 닮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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