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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몸

해군52 2002. 12. 13. 20:56

<정신 없는 놈>이 아니라 <정신 없는 몸> 말입니다
<영혼 없는 육신>이라고 하는게 더 나을까요?

며칠전 고등학교 동창 한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멍청하게도 발인날짜를 착각해서
그 친구 마지막 가는 길에 조문도 못했습니다
조문한들 이미 떠난 친구에게 별 의미도 없었겠지만
여하튼 저는 그날 특히 멍청했습니다

그 친구, 대기업인 외국합작업체 사장까지 올라갔으니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희한한 병에 걸렸습니다

중피종(中皮腫, mesothelioma)이라는 암이라는데
복막과 흉막을 덮고 있는 중피세포에 발생하고
아주 드문 병이라서 의사들도 잘 모를 수 있고
천천히 자라지만 결국은 전이하는데
마땅한 치료가 없는 악성종양(암)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석면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데
컴퓨터 회사에 근무하던 그 친구는
아마 공기 중 어디에나 있는 석면을 흡입하였고
체질(유전자)이 석면에 잘못 반응하지 않았을까
의사들이 그렇게 짐작만 합니다

엊그제 친구들 몇이 저녁을 함께 했는데
자연히 <죽음>이라는 주제가 뜨더군요

친구1:
8순을 넘은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라서
30년전부터 사후에 화장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얼마전에는 화장하지 말고 그냥 매장해 달라고 하시더라
연세가 들수록 화장하는 것이 두려워지나 보다

친구2:
아버님이 병원에 사후 시신기증을 하신다고 해서
기증서를 작성하는데 자식들 동의가 필요하다더라
형들은 동의를 했지만 나는 반대를 했는데
동의자 숫자가 많으니까 그냥 처리되더라
그런데 아버님이 나한테 고맙다고 하시더라

친구3:
사망 즉시 장기를 떼어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거니까 장기기증이 더 좋지 않을까?
시신을 기증하면 두고두고 난도질할텐데 너무 끔찍하다

저녁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런 종류의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아직 종교가 없습니다
산에 다니다가 절이 보이면 가끔씩 법당에 들어가서
제멋대로 절을 하거나 잠시 앉아서
애인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기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 신자는 아닙니다

간혹 이런 생각은 해 봅니다
사람이 죽고나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남아있는 육신은 과연 무엇일까?

연인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던 손도
강변을 달리거나 산길을 걷던 다리도
아름다운 강과 산을 보던 눈도
감미로운 음악을 듣던 귀도
무지개를 보며 기쁨에 뛰던 심장도
영혼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닐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차피 땅에 묻힌 다음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몸이라면
누군가를 위해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금년 중에 장기기증 서약을 하리라고 마음먹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은 건지 아직 몰라서 실행을 못했습니다
연말 전까지는 어떻게든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나이가 좀더 들면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 거 절대 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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