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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살 청춘

해군52 2003. 1. 12. 21:14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다


그 동창 녀석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녀석을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아니 위로는커녕 그 녀석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방법이 없어 난감하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일이...
이렇게 난감할 수가...

한동안 잘 나가던 그 녀석이 보증을 섰다가 집을 날렸다던가
해서 한참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 녀석의 다 큰 아들놈이 이상한 병에 걸리긴 전까지 있었던
어려운 일들은 이제 와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했던 그 녀석 아들놈이
어느날 갑자기 뇌막염이라든가,
소아들이나 걸리는 이상한 병 증세로 입원을 했지만
정확한 병명도, 원인도 알지 못한채
식물인간이 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모두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그놈 살려내려고 온갖 정성을 다 들이더니
그 정성 덕분이었는지 놀랍게도 그놈은 회생하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소아 수준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그렇게 좋아하면서
온갖 방법을 다해 정상으로 돌려 보려고 했었는데...

그놈은 끝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부모의 품에서 청춘을 마감하고 말았다
활짝 피워보지도 못한채 무심한 바람에 떨어진 꽃처럼
그렇게 가고 말았다
스물일곱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빈소로 찾아가니
그 녀석은 아픔을 가슴 속에 깊이 감추고서
태연스레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런 위로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냥 너스레에 맞춰 실없는 말만 하고 말았다

스물일곱살 청춘은 그렇게 가버렸지만
부모 가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한으로 남겠지

부모
자식
그 인연과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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