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자주 만나도 보고 싶은 애인처럼
저에게 북한산은 항상 그리운 존재입니다
새해 벽두 어느날 불현듯이 북한산이 생각났는데
산에 가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라서 망설이다가
코스가 평탄하고 능선까지 빨리 다녀올 수 있는
평창동 매표소로 갔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올라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갈림길에서 만난 아저씨가 내려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제가 올라온 길은 평창동으로 가는데 평탄하고
다른 쪽 길은 형제봉으로 가는데 길이 험하니까
평창동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설명했더니
그렇게 하겠다면서 제가 알려준 길로 내려갔습니다
'그래, 겨울 산에서는 안전한 길이 최고지'
천천히 대성문을 지나 눈쌓인 능선에 오르니
어느 곳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고
매서운 바람만 얼굴을 때렸지만
멀리 보이는 백운대, 노적봉, 만경대 등
북한산 주봉들의 모습이 황홀했습니다
눈보라 속에서도
비바람 속에서도
언제나 우뚝 솟아있는 거봉들의 모습이
정말 사내답고 멋있어서
한동안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꽤 늦었습니다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일선사 대웅전 밖에 서서
잠시 절의 소리를 듣다가
오르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마음이 조금 급하긴 했지만
잘 아는 길이라서 걱정은 안 했었는데
내려오다 보니 어째 길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평탄함이 아니라 바위능선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라, 이게 아닌데...
길을 잘못 왔구나!
어떻게 형제봉으로 왔지?
이쪽은 험한 길이라서 겨울에는 안 좋은 길인데 돌아갈까?
아니, 아는 길이니까 그냥 가지!'
암릉 구간을 오르내리며 급하게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산 아래로 거리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조금 더 조심해야지...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다가 잘못하면
조난 당하거나 사고날 수도 있는데
난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날씨는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형제봉 매표소가 바로 앞에 보였습니다
매표소를 지나면 동네 길이니 다 내려왔습니다
'오늘 난 참 잘 한거야
역시 난 선수야!'
그때 어둠 속에 허~연 바위 바닥이 보였습니다
별 생각없이 그 바위에 한발을 내딛는 순간,
@@@@@@@!!!!!
어찌된 일인지 내 몸이
허옇게 보이던 바로 그 위에 엎어져 있는데
이마와 왼쪽 무릎이
유난히도 바닥과 밀착해 있었습니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바위(?)가 왜 그리 미끄러운지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힘겹게 일어서는데 바로 제 눈 앞에
검은 등산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여인이
어느 여름밤 보현봉 쪽에서 만났던 그 여인,
당집 앞에서 보았던 영정 속의 여인,
바로 그 여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아까 암릉 구간에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뒤를 따라오면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생각났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몇 걸음 옮기니
바로 형제봉 매표소,
사고 지점은 50미터쯤 거리에 있었습니다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이마는 부어오르고
왼쪽 무릎은 아프고...
완전히 패잔병의 모습이었습니다
며칠 지나자 이마의 혹은 멍이 되어
눈가로, 뺨으로 흘러내리면서
얼굴에 예쁜 자주빛 분장을 만들어 주었고
그 덕분에 신년초 한동안 바깥 출입을 못했고
그 후로도 한동안 선글라스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그 사고 얼마후에는
강화도 마니산 시산제에 갔다가
하산중에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는데
보름 이상 침을 맞았지만 아직도 온전치 않아서
등산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후 구정 직전에는
빙판이 된 지방도로에서 신호대기 정지 중에
뒤에 오던 5톤 탑차가 미끄러지면서
제 차 옆구리를 들이받아서
제가 아니라 제 차만
전치 3일간의 치료를 받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북한산에서의 사고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 여인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나를 따라오다가
얼음판에서 딴지를 걸어 넘어뜨렸을까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꽁이라구요?
언제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와의 만남 (0) | 2003.04.10 |
---|---|
<~사>짜 친구들과 (0) | 2003.03.13 |
술의 두 얼굴 (0) | 2003.01.27 |
스물일곱살 청춘 (0) | 2003.01.12 |
대형 교통사고를 예방하려면 (0) | 2003.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