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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의 인생설계

해군52 2007. 5. 5. 23:05

얼마전 업무관계로 화랑을 운영하는 분을 만나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화랑이라는 곳을 잠시 들러서 그림 구경을 한 적은 간혹 있었지만
화랑 경영자를 만나서 대화를 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려면 준비기간이 3년쯤 걸린다든지,
그림에는 양도소득세가 부과되지 않아서 훌륭한 투자대상이라든지,  
인터넷의 발달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가 세계적으로 공유되기 때문에
작가와 작품 가격이 전문가들의 평가에 따라 객관적으로 결정된다든지,
생전에 평가받지 못하던 작가가 사후에 크게 뜨는 경우는 없다든지,
작품활동과 전시활동을 활발히 해야 작가로서 제대로 평가받는다든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화랑 경영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잊지 못할 내용은 그분의 특이한 인생설계이었습니다
 
화랑 경영자이자 미술평론가로서 유명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분이지만
그분의 전공은 행정학이고 주된 사회경력은 은행 간부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25년은 학교 다니고 군 복무하면서 인생을 준비하는 기간
두 번째 25년은 결혼하고 직장생활하면서 가족을 위해 활동하는 기간
세 번째 25년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위해 활동하는 기간
 
이런 인생설계에 따라 자신의 인생 정년이 되는 75세까지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여 왔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은행에 근무하면서 1급 지점장으로, 임원으로 얼마나 잘 나갔는지,
이런 일들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선두주자로 확실한 장래가 보장되던
그 좋은 직장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사실부터는 놀라웠습니다 
 
위와같은 기본설계에 따라서 50세까지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1년 늦은 51세까지 하게 되었고, 
그리고는 은행 경력을 필요로 하는 금융업체 사장직 권유를 뿌리치고,
대학에서 예술경영을 위한 공부도 하고 강의도 하고,
국내외의 예술가들과 교분도 쌓고...       
그러다 보니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화랑 경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화랑 사무실에 빼곡하게 자리잡은 자료들만도 엄청나게 많아 보였는데
작가와 작품에 관한 자료들,
각종 공연과 전시회에 관한 자료들,
유명 작가들과 교류한 편지와 사진들을 비롯해서
조금만 정리하면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할만한 정도의 것들이 
다른 곳에 훨씬 더 많이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영화비디오가 1800편쯤 된다고 하길래
나도 180편은 된다고 한 것이 유일하게 명함을 내본 내용이었습니다^^
 
문화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의식주에만 매달리는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한지,
사회적으로 잘 나가지만 문화에 무지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화의 가치에 대한 그분의 설명에 절대 공감하면서,
미술, 무용, 뮤지컬, 영화, 연극에 대한 해박함에 감탄하면서,
인생설계와 그 실천을 하기 위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 틈에 자정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그분과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
 
내 인생의 설계는 어떤 것인가?
그런 것이 있기나 했었나?
 
스스로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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