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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장애인

해군52 2002. 6. 16. 21:59

<얼이 빠진다>는 말이 있다.

내가 얼이 빠졌던 나의 고백 한가지...

 

 

온 나라가 IMF 파국으로 가고 있던 몇 년전

나 역시 때마침 벌였던 일들이

IMF 직격탄을 맞아 초토화되어 버렸다


나는 참 무기력했다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채권을 회수하려는 채권자들과의 지리한 입씨름,

대책도 없이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는 몸부림,

그런 것들뿐이었다.


채무변제 독촉장,

강제집행 예고장,

법원소송서류,

날마다 이런 우편물들이 편지함에 그득했다

전화벨 소리만 나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그런 생활이 기약도 없이 지속되다보니

그런 것도 면역이 되는지

어지간한 일에는 무감각해지고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한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가 달리기를 시작하던 때였는지라

주차장에서 집으로 천천히 뛰어왔다


날은 이미 어두웠지만 늘 다니는 길이었고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텅 빈 상태로

한손에는 물건을 든채로 뛰었는데

그만 넘어져 버렸다


평지에서 넘어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넘어지더라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그 당시 그야말로 얼이 빠진 상태이다 보니

물건을 든 왼손은 펴지 못한채 넘어졌으니

왼쪽 손톱 하나가 아스팔트 바닥에 주욱 밀리면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왔는데

손톱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 통증이 시작되었다


소독한다고 프로폴리스를 한방울 떨어뜨리고

오징어 뼈를 갈아붙이는 등

응급조치로 지혈은 시켰지만

통증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밤에 병원 응급실에 가기는 싫고

밤새 참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상처에 붙어있는 피딱지를 사정없이 떼어내는데

마치 손가락이 잘라지는 것 같았다


정리하고 나서 보니 손톱 하나가 반이상 없어져 버렸다

축구나 마라톤 하다가 발톱 빠져보기는

이미 여러번 경험이 있었는지라

손톱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다시 나오리라 생각하고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 손톱이 다시 나오는 거죠?


그랬더니 의사는


- 글쎄요, 좀 두고 봐야지요

손톱밑에 손톱 나오는 살이 살아 있으면 다시 나오지만

많이 망가진 상태라서 다시 나올지 모르겠네요


- 그러면 어떡해요?


- 인조손톱을 붙인다든가 그래야죠

  그래도 왼손이라 다행입니다


- ???


당장 아픔따위는 별거 아니었다

손톱 하나라도 없으면 <손톱 장애인> 아닌가?



그후 2주정도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도 손톱은 새로 나왔다

끝 부분이 완전하게 나오지 않아서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손톱 장애인>은 겨우 면했고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손톱을 보면서

얼이 빠질 정도로 힘들었던 그때를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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