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자주 뭉쳐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대학 전공을 달리하는 9명이 모두 소위 범생이들이었다
함께 어울려 다니다가 이념 서클 비스름한 이름도 만들고
거창하게 모임의 <헌장>이라는 것도 만들어서
그 밑에다 전원이 혈서는 아니지만 자필 서명을 했다
그 헌장은 지금 다시 보아도 잘 만든 내용이다
모여서 구국의 길만 논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무교동 낙지집이나 빈대떡집에 가기도 하고
사귀던 여학생 대동하고 놀러가기도 했다
졸업하고 군대가고 직장 들어가고 결혼하고
그러면서도 그 모임은 꾸준히 이어졌고
모두들 결혼한 후에는 부부동반 모임으로 발전했다
그 중 몇 명은 모임에 같이 나오던 상대와
결혼 상대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과에 대해서는 다들 철저하게 입을 다물어 주었다
그러다가 몇 명이 유학을 간 동안에도
나를 포함 국내잔류파들이 줄곧 모임을 지켰었는데
다들 국내로 돌아온 후에 한동안 잘 되던 모임이
언제부터인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분기 모임이 반기 모임으로
다시 연례행사로
모임의 횟수가 엄청 줄어들더니
급기야는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누가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거나
누가 어디에 새 집을 지었다거나
누구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거나
누구 아들딸이 대학에 들어갔다거나
누구 아들이 군대에 갔다거나
심지어는 누가 재혼을 하고 애를 낳았다거나
이런 일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거 친구들 맞나?
9명중에 박사가 4명이고
대학교수 3명에 교육부 관료,
고등학교 교사까지 있다보니
만나기만 하면 교육문제가 주된 화제가 되고
다들 애들 교육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하고
그러다 보면 교육문제 토론장이 되기 일쑤였다
친구들 모이면 흔히 하게 되는
고스톱이나 바둑판 벌이는 일도 없고
온 국민이 즐기는 노래방 가는 일도 없고
등산이나 야유회 가는 일도 물론 없고
모여서 밥 먹고 잠시 지나간 일들 얘기하고 나면
이내 토론장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때쯤 되면 나는 음악듣거나 TV보거나
아니면 아예 자 버린다
이 친구들 너무 진지하니까 저~엉말 재미없다
얼마전 이 모임을 위한 인터넷사이트를 하나 만들었다
서로 소식 전하거나 연락하기 싫으면
사이트 게시판에라도 몇자씩 적어놓아서
소식이라도 알고 지내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아직도 한놈은 가입조차 하지 않았고
열심히 글을 올려도 조회수는 절대 5를 넘지 않는다
인터넷 세상을 모르고 살면 곧 원시인 되는 거니까
들어와서 글좀 올리라고 손가락아프게 메일을 보내도
한놈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망할 놈들!
이젠 나도 지쳐서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
전부다 생각이 진지하고 생활은 모범적인데다
고집들은 또 얼마나 센지
누가 뭐라 해도 듣는 법이 없다
나도 그 옛날에는 저런 모습이었을텐데
<脫 모범생>한 것이 정말 다행스럽다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힐 것같은 저 인간들을
어찌해야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