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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의 <길>

해군52 2011. 6. 1. 15:16


나에게 영화는 인생의 참고서이자 상상력의 원천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잠시나마 현실을 떠나 자유로운 꿈을 꿀 수 있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감독’이라는 닉도 갖게

되었다. 물론 다들 가짜 감독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불러준다.

 

내 친구 중에 진짜 영화 감독이 한명 있는데 바로 80년대 흥행감독으로

날렸던 배창호 감독이다. 배감독은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깊고 푸른 밤><고래사냥><기쁜 우리 젊은 날> 등 80년대 최고의

흥행작들을 만들어내면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의 스필버그'로 통했다.


이후 <황진이>부터는 대중성보다 우리의 전통과 예술적 성취에 눈을 돌려서

<러브스토리><정>을 만들었지만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블랙버스터

<흑수선>으로 대중과의 만남을 시도했지만 흥행에서는 크게 성공하지는

하더니 이번에 다시 돌아와 17번째 작품인 <길>을 만들었다.

 

<길>은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말까지 전라도 시골 마을의 대장장이가

지내온 삶을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담은 로드무비 형식의 시대극이다.

촬영기간 8개월에 총제작비 5억원인 저예산 영화로 2004년 완성됐지만,

필라델피아 영화제를 거쳐 2년이나 지난 2006년 말에야 겨우 소규모로

개봉되었다.

 

배감독이 주인공인 대장장이 태석 역을 직접 연기하면서 애증의 인연,

관용과 용서, 기억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데 맛깔스러운 전라도 사투리

대사가 구수하고 전국 각지의 '길'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2004년 광주국제영화제 폐막작, CJ아시아인디영화제 개막작, 2005년

필라델피아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이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모루를 지고 전국 시장을 떠도는 장돌뱅이

이자 자존심 강한 대장장이 태석의 모습은 자신의 창작의지를 고집하는

장인으로서의 배감독과 꼭 닮아 보인다.

 

“독립영화가 곧 돈 적게 들이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죠.

자본으로부터 창작의 정신을 지키는 영화를 말하는 거예요.

자본이 주인공이 되면 영화의 개성이 없어져요.

천만명이 좋아하는 영화뿐만 아니라 만명을 위한 영화도 나와야죠.”

 

배감독의 이런 생각이 영화시장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기 바란다.

 

(사보 2011.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