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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결혼하고 싶다-2

해군52 2004. 2. 1. 15:23

 

제자로서 스승의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이겠지만, 선생님은 교사로서, 문교부 관료로서, 대학교수로서, 과학자로서, 총장으로서 관여하셨던 모든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일생동안 젊게 살아오신 분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까까머리 경희궁’ 시절,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다가 옆반 창문으로 낯선 얼굴을 보았다. 어느 선생님이 뭔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계셨는데, 미국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키가 큰 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로 오신 생물 선생님이었다. 이 장면이 나의 선생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이렇게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을 처음 만나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 교정에서 여러 해를 함께 지내는 동안 많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생물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내용 DNA, RNA 등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최첨단의 지식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에 의하면, 그 당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던 내용은 대학 전공 과정에서나 다루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부임하셨던 선생님은 최신 학문의 내용을 전해 주셨고, 어린 우리들은 그런 내용을 겁도 없이 무제한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문과였던 내가 생물에 관한 한 어려움이 없었고, 대학입시에서도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공부만 강조한 분은 아니었다. 학교 신문이나 교지에 글을 자주 쓰셨는데 ‘깡통을 옆에 놓고 화장실 갈 시간도 아낄 정도로’ 열심히 살라는 내용은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잊지 않고 있다. 당시 학교별 대항전으로 선생님들의 축구경기가 매년 있었는데, 센터하프를 맡았던 선생님은 큰 키를 이용한 헤딩과 롱킥으로 발군의 활약을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맡는 동안 학생회 지도교사로서 남다른 관계를 갖기도 했던 젊은 선생님은 어린 우리들을 잘 이해해 주셨고, 우리들도 선생님을 때로는 큰형님처럼 많이 따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선생님과의 만남은 계속되었는데, 대학 1학년 때였던가,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면서 내게 결혼식 사회를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나는 결혼식 사회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쉽사리 승낙을 했지만, 이 멋진 계획은 선생님 친구분들의 심한 반대로 실행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었지만 오랜 후에 생각해 보니 결혼식 사회자로 대학생 제자를 생각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계획이 실행되었더라면 나로서는 평생 간직할 커다란 영광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이렇게 공부는 물론이고 운동 잘 하시고, 글 잘 쓰시고, 10대 감수성을 잘 이해해 주시던 선생님은 후에 문교부 편수관을 거쳐 대학 교수가 되셨고, 드디어 국립대학 총장이 되었다. 선생님의 총장 취임식에 참석하러 가던 그 날, 함께 가던 친구들과 선생님과의 지난 추억 찾기에 가는 길이 먼 줄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봄날, 선생님의 큰아드님 결혼식이 있었다. 신랑은 선생님을 닮아서 훤칠한 키의 미남이었고, 신부도 잘 어울리는, 눈이 부시게 멋진 커플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많은 신랑신부들을 보았지만, 그날따라 그 커플에 매료되어서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내가 소속한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다시 결혼하고 싶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정말 그랬다. 그들처럼 풋풋한 젊음으로 다시 살 수 있다면 말이다.

 

정년퇴임을 하시고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선생님은 언제나 젊은 모습 그대로, 아드님 커플의 모습과 함께 내게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은사 정완호 교원대학교 총장 퇴임기념 문집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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