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벌써~’라는 산울림의 노래처럼 정말 아니 벌써, 우리나이가 4학년 2학기로 들어선지도 한참되었다. 까까머리에 교복입고 있던 때가 며칠 안된 것 같은데 40대 중반이라니, 이게 웬일이냐. 오랫만에 만난 동기생의 머리에 내려앉은 서리를 볼때나, 결혼 몇주년인지를 헤아려볼때나, 또 어느날 내 키를 훌쩍 넘어버린 아들녀석을 볼때면, 내 나이도 이젠 꽤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물론 각자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대부분 학교졸업-군복무-취직-결혼-정신없는 회사생활 기타 업무의 연속-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이런 흐름이겠지. 그리고 지금쯤은 각분야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한마디쯤 할 수 있는 위치에 와 있겠지. 만족할만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이만큼이나마 이루어내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을까.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일, 힘들고 어려웠던 일, 후회스러운 일이 모두 있겠지.
여하튼 우리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40대 후반에 와 있고, 이제 살아갈 날, 그중에서도 제대로 활동하면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모자랄게 뻔한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나이 정도가 되면 예전에 못마땅하던 일, 기분나쁘던 일, 이해하지 못하던 일 등등도 모두 덮어버릴 수 있어야 하겠지. 그게 인간적인 성숙일지 아니면 무감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말들이다.
“나 걔 꼴 보기 싫어서 모임에 안 나갈래.” “그놈 잘난체하는 거 정말 못봐준다구.” “그 녀석 얘기는 내앞에서 꺼내지도 마!” “그 자식은 생각하기도 싫어!” “그 새끼 저나 잘하지” “즈네들끼리 잘해먹으라고 해”
아니, 이게 다 무슨 ×같은 소리들이냐? 위에서 말하는 ‘걔=그놈=그 녀석=그 자식=그 새끼=즈네들’이 모두 우리 23회 동기생일진대 이 무슨 해괴망칙한 말이냐? 어떻게 이런 소리가 가끔씩이라도 들릴 수 있냐? 어차피 동기생이란 게 어려서부터 정으로 만난 사이인데 무슨 이해관계나 이념으로 만난 것처럼 재고 따지고 할 일은 없지 않겠냐? 지금와서 누가 잘났고 못났고를 따진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을거고 또 그게 뭐그리 대단한 일이냐? 직장생활을 하든, 구멍가게를 하든, 큰회사 사장이든 무슨 상관이고 또 잠시 백수가 되었으면 어떠냐? 전철을 타든, 엑셀을 타든, 그랜저를 타든 그런 것들이 동기생 사이에서 서열을 매기는 것도 아닐텐데. 우리가 나무상자속에 들어가고 사진액자에 검은 리본이 쳐졌을 때 우리 가족 말고 누가 제일 슬퍼해 주겠냐? 미우나 고우나 바로 ‘걔=그놈=그 녀석=그 자식=그 새끼’가 와서 술이라도 한잔 따라주고 슬퍼해주지 않겠냐?
혹시라도 미워하고 일부러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동기생이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고, 한놈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 바로 그놈에게 전화한통 하자. 만나서 점심에 식사 한번, 저녁에 소주 한잔, 아니면 주말에 등산 한번만 같이 해보자. 정 서로 바쁘다면 전화 한 통만이라도 해보자. 우리가 언제부터 원수지고 산 일 있었냐? 혹시 서로 잘못한 일이 있었더라도 뭐 그리 큰일이었냐? 이제 4학년 2학기를 맞은 나이에 걸맞게 놀자. 우리 이대로 인생을 졸업할 수는 없지 않겠냐?
나에게 못마땅한 일이 있어서 만나기 싫었던 놈, 아니 분이 있다면 지금 바로 전화해라. 진로는 내가 살테니까. 그런데, 사실은 조금 걱정된다. 혹시 내 전화통에 불나지 않을까?
(고등학교동기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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