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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뛰는 40대 (1999.0401)

해군52 2003. 1. 1. 16:39

 

 

 

어느날 강성률 선수가 저녁먹는 자리에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자는 제안을 했다. 얘기인즉, 안중철 선수(얼마전 ‘박사’가 되신 분이다)와 강선수가 의기투합, 뜀박질모임을 창설하여 각기 자칭 회장과 총무를 맡기로 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중이었다. 우선 서울마라톤 10키로부터 시작해서 내년에는 하프코스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풀코스에도 도전하자고 했다. 무언가 새로운 도전목표에 대한 흥분과 이미 상당수 회원이 포섭되었다는 말에 속아 겁없이 즉석에서 동의를 했다. 조깅이나 런닝머신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십선도회(박종식 대장 휘하의 막강군단으로 일명 ‘산악유격대’)의 일원으로 산을 헤매고 다닌 경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냉정히 생각해보니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키로미터단위를 뛰어본 일이 없으니 도대체 10키로가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며칠을 벼르고 별러서 생전 처음 산 조깅화를 신고, 동네 중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 한바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10바퀴쯤(3바퀴를 지나니까 기억이 안됨)을 28분동안 뛰었다. 지독하게도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온몸이 멀쩡한 게 신기하였다. 그후 몇번 비슷하게 뛰어 보았지만 내가 몇키로를 얼마의 속도로 뛴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강선수가 등록일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였다. 8명(안중철, 강성률, 이화섭, 이백규, 조항덕, 김영-반쪽 동창, 박근성-동성고 출신이면서 23회 동기회비를 내는 친구, 그리고 나)이 선수로 등록되었다.

 

한동안 친구들이 모이면 늘 뜀박질이 화제였다. 할 수 있다, 없다,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 정 안되면 걸으면 되지 않냐고 하면서도 어느 한놈도 진짜 걷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게 뻔했다. 실전코스에서 한번 뛰어 보아야 한다고 해서 대회 2주전 토요일 몇몇 선수가 여의도 고수부지에 모여 63빌딩 앞 주차장에서부터 동작대교까지 왕복을 함께 뛰어 봤다. 장난이 아니었다. 이백규 감독(?)이 대회 3일전부터 고기만 먹어야 한다고 해서 며칠간 고기를 엄청 먹어댔다.

 

대회당일인 3월7일 어린(?) 아들딸에게 비장한 각오를 보이고 집을 나섰다. 여의도에 도착하니 5키로, 10키로, 하프코스, 풀코스 4종목에 수천명이 참가한 대회장은 축제분위기였다. 남녀노소, 주한외국인, 직장단위팀 등 이색적인 참가자들도 많았다. 하프코스에 출전한 김수철이를 현장에서 만났다. 기다리던 출발시간-총소리와 함께 뛰쳐나갔다. 유니폼에 1504번 번호를 붙이고 한강변을 뛰는 기분이 괜찮았다. 반환점인 동작교가 보이는 지점에 왔을 때 선두주자(아시안게임 우승경력의 일본선수)가 벌써 반환점을 돌고나서 마주 지나가고 그 뒤에 황영조 선수가 지나갔다. ‘나 황영조하고 같이 뛰었다!’ 반환점에 준비된 물을 마시고 종이컵을 던지면서 생각했다. ‘나 진짜 마라톤 선수 됐구나!’

 

반환점을 돌고나서 마주 오는 우리 선수들과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이화섭 선수가 212번째라고 소리쳤다. 그 많은 참가자들 중에 내가 212번째라니! 잘하면 200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 싶어서 조금 속도를 높혀 몇명을 앞질렀다. 그런데 웬걸, 약효가 금새 나왔다. 한강철교쯤에서부터 왼쪽 옆구리가 땡기기 시작했다. 조금 처지자 계속 추월자가 생겼다. 이러다가 걷는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군대훈련시절부터 IMF이후 어려웠던 온갖 일을 떠올리면서, ‘여기서 꺾이면 안된다’고 수없이 다짐하였다. 여의도가 보이는 지점에 오자 이상경이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사진기자처럼 폼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중에 보니까 내 사진은 못 찍었더라) 여의도 고수부지에 들어서자 수많은 관중들이 몰려나와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내야지. 멋지게 골인하고 쓰러져야지’ 그런데, 바로 앞에 보이는 골인지점까지가 왜 그리도 멀던지. 골인지점에는 김진식이가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내 사진은 못 찍었더라. 내가 너무 빨리 왔나?) 51분 48초. 골인하고나서도 난 쓰러질 수가 없었다. 완주기념 메달을 줄서서 받아야 했기 때문에. 7명의 선수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모두 빛나는 금(색)메달을 목에 걸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포즈를 잡고 한강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그날 마포 갈비집에서 소주를 꽤나 마셨다. ‘참 장하다, 이 나이에 10키로를 뛰다니!’ 모두가 완주한 게 자랑스러웠다. 평소에는 원수같던 얼굴들도 그때 그 순간만은 정말 예뻐 보였다. 모두들 기분이 좋았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는 마라톤 하프코스를 뛰자고 했고 풀코스 이야기도 나왔다. 내가 전광판에 축하광고를 내자고 제안하자, 모두가 좋다고 했다. 술기운을 포함한 객기였다.

 

그날부터 나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였다. ‘나이살이나 먹은 놈들 8명이 뜀박질 10키로를 완주했다고 광고한다면 웃음거리되기 십상일게고, 어떻게 하면 의미있는 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최영철이를 만나자 쉽게 해결되었다. ‘IMF상황-반전해서 마라톤경기 장면-8명 개인사진-마무리’ 이런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정리하였고 필요한 자료화면을 수집하였다. 감독 최영철, 기획 이남수, 촬영 이상경, 홍보 김진식, 주연 안중철외 7명의 ‘다시 뛰는 40대’라는 39초짜리 광고화면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화면제작 작업을 하는 한편, 방송사와 섭외하여 이 사건(?)을 뉴스보도하기로 하였다. 광고화면이 양재역 전광판에 뜨던 3월19일 저녁, 선수들을 포함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광고화면 시사회를 가진 다음 축하 소주파티가 이어졌다. 이날 YTN이 이 사건을 취재하여 3월22일 뉴스시간에 ‘40대 8인이 만든 공익광고’라는 제목으로 특종보도함으로써 온세상에 알려졌다. 3월24일 문화일보가 사회면 박스기사로 실으면서 ‘서울고 23회’라고 부제를 달기도 하였다. 또한 3월24일 MBC 9시뉴스가 ‘힘내라 40대여’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고 같은 방송 ‘화제집중’ 프로에 방영한 후에는 가히 온나라가 떠들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편집자의 판단에 따라 1안 또는 2안을 선택할 것)

 

(1안)이후 이 광고는 ‘다시 뛰는 여성들’‘다시 뛰는 신세대’‘다시 뛰는 원로들’‘다시 뛰는 우리가족’‘다시 뛰는 우리나라’로 이어지더니 ‘다시뛰는 백수들’‘다시 뛰는 한국축구’‘다시 뛰는 **당’‘다시 뛰는 **그룹’ 등등 ‘다시 뛰는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청와대에서는 국민사기진작에 기여한 공으로 훈장을 수여한다고 하였으나, 상받자고 한 일이 아니라서 사양하였다. 공보처에서는 공익광고에 출연해 달라고 하고, 각방송사로부터 프로출연 섭외가 이어지고 있으나 8명의 스케줄이 조정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각종 상품광고에 모델로 출연해 달라는 제의가 계속되고 있으나, 의리상 진로와 종근당에만 출연하기로 하였다. 이 광고를 방영한 양재역 전광판은 주목율 전국제1이 되어 대형광고주로부터 장기광고계약 의뢰가 줄을 잇고 있어서 프레미엄이 엄청 붙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8인의 방송활동은 이홍재를 매니저로 하고 수익금은 23회 장학기금으로 기증하기로 하였다.

 

(2안) 처음 10키로뛰기를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뛰어보니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매주 10키로뛰기를 함께 하고 있으니까 빠르면 금년 가을, 늦어도 내년봄에는 하프코스에 도전해 볼 만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신동국 선수, 한계남 선수처럼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술담배를 적정선에서 자제할 수만 있다면. 이제 우리나이가 건강을 관리해야 할 나이이기도 하고 아직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뜻이 있는 친구들은 모두 함께 뛰자. 건강은 내 스스로 지켜야 한다. 화이팅 40대! 화이팅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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