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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남자들을 위한 노래

해군52 2023. 11. 29. 14:46

세상이라는 거대한 상대와 한창 전투를 벌이던 시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뭔가에 쫓기듯이 보내는 날이 많았다.

야근도 자주 했지만 간혹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지친 몸을 버티고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볼 때가 있었다.

어깨에 무거운 짐이 얹혀 있던 그때 그 시절,

내 이름은 아버지그리고 남편이었다.

 

이런 중년 남자의 모습을 그린 노래가 남자의 인생이다.

가황이라 불리는 나훈아가 작사, 작곡하고 직접 부른 곡이다.

가사를 듣고 있으면 지나간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어둑어둑 해 질 무렵 집으로 가는 길에

빌딩 사이 지는 노을 가슴을 짠하게 하네

광화문 사거리서 봉천동까지 전철 두 번 갈아타고

지친 하루 눈은 감고 귀는 반 뜨고 졸면서 집에 간다

아버지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남자의 인생

 

그냥저냥 사는 것이 똑같은 하루하루

출근하고 퇴근하고 그리고 캔 맥주 한잔

홍대에서 버스 타고 쌍문동까지 서른아홉 정거장

운 좋으면 앉아가고 아니면 서고 지쳐서 집에 간다

남편이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남자의 인생

 

환갑을 지나 지공거사가 되고 노인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니

오랜 세월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은 사라졌다.

나를 쫓아다니던 많은 일들이 나를 지나쳐 가버렸는지 홀가분해졌다.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주워 담았던 것들도 사라졌는지 텅 빈 느낌이다.

피끓는 청춘도, 뜨거운 사랑도 모두 보이지 않는다.

 

이런 노년에 들어선 남자를 그린 노래가 빈 지게.

70대 후반에도 기름진 목소리를 가진 젊은 오빠, 남진이 부른 곡이다.

평생 지고 다니던 지게도, 술잔도 모두 비어 있고,

미련도 남아 있지 않으니 어지간히 도가 높아진 모습이다.

 

바람 속으로 걸어왔어요 지난날의 나의 청춘아

비틀거리며 걸어왔어요 지난날의 사랑아

돌아보면 흔적도 없는 인생길은 빈 술잔

빈 지게만 덜렁 매고서 내가 여기 서있네

아~ 나의 청춘아 아~ 나의 사랑아

무슨 미련 남아 있겠니

빈 지게를 내려놓고 취하고 싶다 술아 내 맘 알겠지

 

며칠 전 고등학교 동기들의 연말 모임 무대에서

남진과 나훈아 두 형님의 노래 한 곡씩을 불렀다.

세기의 라이벌인 두 형님들의 수많은 노래들 중에서

우리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노래를 선곡했는데

관객들에게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다.

청승맞기는 하지만 70대 남자를 위한 노래로는 제격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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