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나흘째날, 저녁 식사 후 발레 공연을 관람하고
열차 편으로 모스크바를 떠나 페테르부르그로 이동합니다
버스가 으슥한 뒷골목으로 들어가는데 바로 기찻길 담장 뒤편입니다
짐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포터에게 맡기고 역으로 들어가니
밤11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사람과 짐으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이 역은 ‘모스크바’ 역이 아닌 ‘페테르부르그’ 역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부산행 기차가 떠나는 역은 서울에 있지만 ‘부산’역이고
서울행 기차가 떠나는 역은 부산에 있지만 ‘서울’역인 셈입니다
표 검사도 없이 플랫홈으로 들어가서 열차 앞까지 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표를 가진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 후에 포터와 함께 나타난 가이드의 사연인즉,
포터가 엄청난 요금을 달라고 해서 깎기는 했지만
마냥 싸울수도 없는 상황이라 결국 바가지를 썼다고 합니다
밤 11시에 탑승한 열차 이름은 푸른 색의 ‘붉은 화살’인데
플랫홈과 열차 사이가 넓어서 발이 빠질 것 같습니다
* 일행이 찍은 사진
열차 안에는 긴 복도가 있고 복도 한쪽으로 작은 방들이 있는데
각 방에는 좌우 양쪽, 상하 2층으로 작은 침대 4개가 있습니다
침대 밑으로 짐을 넣고 옷을 걸고 교육받은대로 문을 잠가 보는데
각 방마다 여성동지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침대가 좁다’
‘방에서 냄새가 난다’
‘기차 소리 때문에 잠이 안 오겠다’
해군 시절 함정 생활과 비교하면 전혀 불평할 상황이 아닌데
그래서 군대를 다녀와야 하나 봅니다
2층 자리에 누워 모스크바에서의 며칠을 잠시 돌아보며
‘어젯밤 이 자리에서 누가 잤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달리는 기차소리 리듬에 맞춰 금새 잠이 듭니다
잠을 자고 깨어보니 기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고 창밖은 훤합니다
화장실에 물이 안 나와서 비싼 생수로 양치와 세수를 합니다
변기 오른쪽에 달린 레버를 붉은 화살표 방향으로 돌리면
변기위 앉는 자리에 1회용 비닐 카바가 덮히게 되고
작업을 마치고 변기 앞에 달린 페달을 밟으면
변기 안의 노란 판이 열리면서 생산물(?)을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잠시후 여성동지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립니다
‘화장실에 물이 안 나온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물이나 전기를 통제하면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는 본질 아닌 것에 얼마나 많이 매달리고 있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기차 승강구의 창으로 밖을 내어다 보니
기차는 나무숲, 벌판, 마을을 지나서 정말 화살처럼 달립니다
작은 역을 통과하기도 하고 어느 역에서 잠시 멈추기도 합니다
이른 시간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남아있는 레닌 흉상도 보입니다
창밖을 보면서 잠시 공상을 해 봅니다
‘여기에 혼자 남게되면 새로운 삶을 살까, 아니면 걸어서라도 서울로 갈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나치는 화물기차에 실린 컨테이너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합니다
이 해운회사가 처음 생겨서 아직 선하증권 발급을 못할 때
그 회사 선하증권에 제가 사인을 해 준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 회사의 컨테이너를 여기 와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 컨테이너는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그
아니면 다른 북유럽으로 우리 상품을 실어나르고 있을 겁니다
아침 8:30, 밤새 달려온 기차가 드디어 ‘모스크바’ 역에 도착합니다
물론 이곳은 모스크바가 아닌 페테르부르그입니다
역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앞에 보이는 거리와 건물 사진을 찍는데
웬 제복을 입은 남자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면서 난리를 칩니다
경찰인지, 역 직원인지, 아니면 택시 운전사인지 알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처음 간 곳에서 싸울 수도 없는 일이고
대충 무시하고 뒤돌아서서 다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봐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다고 하니
아마도 그 남자 지난 밤에 자기 마누라하고 싸웠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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