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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의 첫 경험

해군52 2002. 2. 2. 14:52

지하철을 타면 경로석이라는 것이 있다.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 놓으라고 써 있지만 간혹 젊은 친구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어른이 나타나도 그냥 모른체 앉아 있기도 한다. 나도 어쩌다가 피곤할 때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만, 그런 때면 영락없이 가시방석이다. 우리세대는 어려서 받은 교육이 몸에 배어서인지, 어른인 듯한 분이 앞에 보이면 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한다. 요즘도 자리에 앉아 있다가 중년쯤 되는 분이 앞에 보이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하다가 나 자신을 다시 붙잡아 앉히는 때가 가끔 있다.

 

머리가 좀 빠지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떤 친구는 지하철에서 일부러 제일 뒤쪽 벽에 기대서 간다고 한다. 자리 앞에 서 있으면 자꾸 자리를 양보하려고 해서 그렇단다. 그 친구는 산에 가면 날아다니고 술을 마시면 아직도 말술이지만 얼굴만 보면 나이보다 10년은 더 들어 보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친구하고 술집에서 떠들면서 얘기하다 보면 주인 아줌마한테 야단맞기 십상이다. 한참 윗사람에게 반말한다고 말이다. 반말뿐만 아니라, 툭하면 욕까지 해대니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겠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넌 늙었으니까 그렇지."라고 하면서 많이도 놀려 먹었다. 마치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듯이 말이다.

 

얼마전 유난히 피곤한 일이 있었던 날이었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본격적인 퇴근시간이 되기 전이라 지하철 안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여느날처럼 가방에 든 책을 꺼내고 나서 가방을 선반 위에 얹었다. 막 책을 펴는 순간, 앞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면서 나보고 앉으라고 한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내가 깜짝 놀라면서 그냥 앉으라고 하니까, 곧 내린다고 했다. 다시 앉혀 놓고 얼굴을 자세히 보니, 20대 초반으로 학생이라면 대학3학년쯤, 직장인이라면 신입사원쯤으로 보였다.

 

"저 아가씨가 왜 일어났을까?"

"오늘 내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일까?"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책을 펴들고 서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옷차림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 노땅 차림은 아니었다.

 

지하철에서의 첫 경험은 내게 이렇게 일어났다. 아직은 자리를 양보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이젠 어찌 해야 할까?

 

"머리 염색이라도 해야 할까?"

"지하철 뒷쪽 벽에 기대서 다닐까?"

"아니면 노인어른들이 앉아 계신 경로석 앞에 가서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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