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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해군52 2002. 2. 20. 14:57

지난 크리스마스 때 가족들에게 책 한권씩을 선물했다.

 

아들에게는 한 청년의 북극~남극 탐험기를,

딸에게는 어느 교수의 법과 영화 얘기를,

그리고 앤에게는 이런 책이었다.

 

제목은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부제는 <화가 최용건의 진동리 일기>

 

제목이 그럴듯해서 선택한 책이었는데 앤이 다 본 다음, 나도 읽었다.

 

저자 최용건(53세)은 서울대 미대를 나온 화가로 1996년 여름

도회생활을 청산하고 백두대간 깊숙이 있는 방태산 근처 마을 진동리에

<하늘밭 화실>을 열고 약간의 경작과 더불어 민박을 치면서 살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5년 3개월 간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도라지 농사, 옥수수 무인판매, 토종벌 양봉 등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삶의 기쁨들은 마음의 곳간 깊숙이

평생 일용하고도 남을 만큼 저장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두 식구 생활하는 데 월 80만원 정도면 여유있는 편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토종벌 관리와 텃밭 가꾸기를 열심히 해서 월 50만원을,

부인은 자수공예 일을 조금씩 맡아서 월 30만원을 벌어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가난이란 무능의 소산이 아니라 깨달음의 소산이며

행복이란 게 욕심을 덜어 한가로워질 때 비로소 찾아오더라고 말한다.

 

과장이나 미사여구 없이 일기처럼 써 내려간 편안한 문체와

직접 그린 100여컷의 진동계곡 삽화로 채워진 책이

소박하면서도 넉넉함을 준다.

 

책 중의 한쪽,

<달빛 화석이 되고 싶은 밤>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용해 본다.

 

아내마저 잠들어버린 골짝엔 이제 인적이란 인적은 모두 끊겼다.

달빛에 홀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퍼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선다.

산책을 하려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듯 조심스럽게 들길을 걸어본다.

오늘따라 이 골짝의 모든 길들은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고,

달빛 은은한 밤은 내시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듯 신비하기만 하다.

내밀하게 가슴을 조여오는 이 기쁨, 이 설렘,

달빛 아래 이대로 화석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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