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크리스마스 때 가족들에게 책 한권씩을 선물했다.
아들에게는 한 청년의 ‘북극과 남극 탐험기’를, 딸에게는 어느 교수의 ‘법과 영화’ 책을, 그리고 아내에게는 이런 책이었다. 제목은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부제는 '화가 최용건의 진동리 일기'
제목이 그럴듯해서 선택한 책이었는데 아내가 다 본 다음, 나도 읽었다.
저자 최용건(53세)은 서울대 미대를 나온 화가로 1996년 여름 도회생활을 청산하고 백두대간 깊숙이 있는 방태산 근처 마을 진동리에 ‘하늘밭 화실’을 열고 약간의 경작과 더불어 민박을 치면서 살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5년 3개월 동안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도라지 농사, 옥수수 무인판매, 토종벌 양봉 등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삶의 기쁨들은 마음의 곳간 깊숙이 평생 일용하고도 남을 만큼 저장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두 식구 생활하는 데 월 80만 원이면 여유 있는 편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토종벌 관리와 텃밭 가꾸기를 열심히 해서 월 50만원을, 부인은 자수공예 일을 조금씩 맡아서 월 30만원을 벌어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가난이란 무능의 소산이 아니라 깨달음의 소산이며 행복이란 게 욕심을 덜어 한가로워질 때 비로소 찾아오더라고 말한다.
과장이나 미사여구 없이 일기처럼 써내려간 편안한 문체와 직접 그린 100여 컷의 진동계곡 삽화로 채워진 책이 소박하면서도 넉넉함을 준다.
책 중의 한쪽, ‘달빛 화석이 되고 싶은 밤’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용해 본다.
아내마저 잠들어버린 골짝엔 이제 인적이란 인적은 모두 끊겼다. 달빛에 홀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퍼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선다. 산책을 하려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듯 조심스럽게 들길을 걸어본다.
오늘따라 이 골짝의 모든 길들은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고, 달빛 은은한 밤은 내시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듯 신비하기만 하다.
내밀하게 가슴을 조여 오는 이 기쁨, 이 설렘, 달빛 아래 이대로 화석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 :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가족에게 가끔씩 책을 선물했었다. 어떤 책이 좋을까, 고르는 재미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런 일이 사라져버렸다. 세상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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